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준경 (문단 편집) === 선조를 옹립한 원임 정승 === 영의정에 오른 후 명종이 승하하자 선조 즉위 과정에서 원임 대신으로 정국을 주도하는 모습을 보인다. '을축년 하서'를 근거로 덕흥군의 삼자 [[선조(조선)|하성군 균]]을 사왕(嗣王)으로 봉영하도록 했다. '을축년 하서'란 명종이 승하하기 2년 전인 1565년 9월 명종이 의식을 잃고 쓰러졌을 때의 일을 말한다. 당시 신하들과 인순왕후는 하성군에게 병 간호를 시켰다. 조선에서 왕의 간호는 왕세자가 맡던 일이므로, 이는 하성군을 명종의 후계자로 인정하겠다는 뜻에 가까웠다. 후계자 선정은 매우 중요한 일이고 신하들이 함부로 이를 행하는 것은 자칫하면 '택군'이라 하여 역모 수준의 중죄로 취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의식을 회복한 뒤 명종은 이 일에 대해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다. 이를 볼 때 명종 본인 또한 당시 하성군을 암묵적으로 후계자로 인정한 듯 하다. 명종비 인순 왕후 심씨가 주도권을 인종 비 인성 왕후에게 넘기려 하자 '''정사가 내전에서 나와야지 다른 곳에서 나오면 안 된다'''는 이유로 말렸다. 이어 하성군이 똑똑하고 성년(15세)을 지났으니 수렴청정을 하지 않겠다는 인순 왕후를 "왕실에서 자란 것과 밖에서 자란 것은 다르다"는 이유를 들어 설득함으로써 최초로 방계로서 왕위를 이은 선조를 인순 왕후가 수렴청정하게 해 왕권의 안정을 기했다. 이 때의 일화로 청탁 명부를 불태워버린 일이 있다. 하성군을 사왕으로 대내까지 봉영하는 과정은 어수선하고 허술하기 그지없었는데, 승지 이양원은 덕흥군의 세 아들 중 누구를 불러내야 할지 몰라서 우왕좌왕하고, 하성군의 외삼촌 정창서는 공신 녹훈이나 포상을 노린 사람들의 청탁을 받아 명단을 정리해 넘길 정도였다. 국조인물고에 따르면 "명령이 대내에서 나왔는데 신하가 어찌 관여하랴?"며 이 명단을 불태워버린 것이 이준경이었다. 선조 3년(1570년)에는 정공도감을 설치해 방납의 폐단을 개혁하려 했으며, [[기묘사화]]와 [[을사사화]]의 피해자들을 신원했다. 정확하게는 정미년 양재역 벽서 사건과 기유년의 사건 피해자들을 신원했다. 신원 과정에서 선조는 나이가 어려 당시의 일을 정확하게 알지 못했고, 대신들은 누구를 어떻게 신원해야 하는지 아뢰는 것을 꺼렸는데 이준경의 주도로 인물별 행적과 합당한 신원 / 추증을 싸그리 정리해서 올렸다. 이때 [[이이(조선)|이이]]가 성급하게 을사 공신들의 위훈 삭제를 요청하자 그걸 우선 저지한 것도 이준경이다. 아마 기묘 사화의 참사를 바로 눈 앞에서 본 이였기에 그럴 것이다. 선조가 즉위한지 2년밖에 지나지 않은 상황에 명종 말년의 척신 세력들이 아직 다 정리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을사년 위훈의 삭제는 좀 위험하다고 판단했던듯 하다. 실록에 따르면 을사년에 억울하게 죄 받은 이가 있다는 것은 이준경이 먼저 언급했는데, "'''더러''' 착한 선비가 억울하게 죄를 받아 그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는데 이이가 대놓고 "대신의 말이 어떻게 이렇게 모호할 수가 있냐"며 "위사는 위훈이고 이때 죄 받은 사람들은 '''모두''' 착한 선비"라고 까버렸다. 이준경이 다시 "선조의 일을 함부로 고칠 수 없다"고 우회하자 이이가 또 "명종도 그 때 일을 후회하고 있을 것"이라고 받아쳐버렸다. 당시에는 이이도 말 그대로 거침없는 신진이요 구도 장원의 스타였던지라 이 사건 이후로 대립하면서 서로 감정이 나빠졌다. 이어 을사 위훈 삭제에 대한 요청이 일어났는데, 이준경 역시 몇 차례 상소하며 여론을 지원했다. 당시 선조는 이준경이 처음에는 언급하지 않거나 우회하다 상소를 올려 여론을 지원하자 등떠밀린 것이라 판단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이준경은 "과오를 고치기 쉬운 작은 것부터 고쳐나가려 한 것인데 이제 정당한 논의가 크게 일어나니 막을 이유도 명분도 없다"고 재차 상소했으나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을사 위훈은 선조 10년 11월 대비 인성 왕후의 눈물겨운 유언을 선조가 받아들여 삭제되었다. 인성 왕후는 인종의 왕비로 사적으로는 덕흥군에게는 형수가 되고, 선조에게는 큰어머니가 된다. 인성 왕후의 청이 어찌나 간절했던지 선조가 우선 거절하고 나오다 인성 왕후의 통곡 소리를 듣고 자리에 주저앉아 "내가 녹이나 받아먹으며 살았으면 편안히 살았을 텐데 어쩌다 임금이 되어 이렇게 난처한 상황을 맞았구나."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이 해에 선조로부터 궤장을 하사받고 사궤장연을 매우 검소하게 치렀다. 선조 4년(1571년) 사직하여 명예직인 영중추부사로 물러났다. 물러난 뒤에도 정몽주의 후손을 서용할 것을 주청하고, 홍수와 가뭄이 들자 세금을 적게 거둘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이이를 깐 것 때문[* 여기에 대해서 십만 양병설 드립치기도 하는데, 십만 양병설이 '''진짜로 존재하긴 했느냐'''문제는 차처하고, 이준경은 1572년에 죽었고, 이이가 십만 양병설 주장했다는 기록은 1582년 기사에 나온다.]에 당대에는 평가 절하된 경향은 있지만 역사연구가들에게는 조선의 재상들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명재상 중 한명으로 평가된다. 관직에서 물러난 이듬해인 선조 5년(1572년) 병상에 누운 후 최후의 유소를 올렸는데 그 내용이 군왕은 학문에 힘쓰고 위의를 잃어서는 안되며[* 잘못된 것이 있어도 지나치게 면박주지 말고 너그럽게 받아들이라는 의미였다. 당시 선조는 젊고 재능있지만 지나치게 엄한 임금이었다. 판서 송기수가 을사 사화 피해자들의 신원을 아뢰면서 눈물을 흘리자 '그때 조정에 있었다면서 뭐 했나'라고 까고, 주변에서 '목숨이 달린 일인데 그게 쉽겠어요...'라고 쉴드치자 '그때 간언했던 백인걸은 끄떡없이 살아있는데?'라고 면박을 줘버렸다.] 군자와 소인을 잘 분간해야 하고 붕당을 경계하라는 것이었다. 이이는 이준경의 유소에 대해 '사림의 분열을 언급하여 훈구의 공격 빌미를 준다'는 이유로 비판했다.[* 하지만 결국 정말 [[심의겸]]과 [[김효원]]의 갈등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붕당 정치의 장이 열렸으니 이준경의 우려가 틀렸다고 보기 힘들다.] 인생 자체가 [[사림파]]가 조선의 정국을 주도하게 된 과정과 일치한다. [[연산군]] 때 죽다 살아난 후 [[중종(조선)|중종]] 때 [[기묘사화]]를 보고 [[김안로]] 등의 권신 시대를 거쳐서 명종 때의 척신 정치 때까지 세력을 계속 확장한 후 [[윤원형]]의 몰락과 함께 조선의 정국을 중심으로 떠오른 후 [[선조(조선)|선조]] 때부터 조선의 주도 세력이 된다. 이후 [[붕당]]까지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