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준경 (문단 편집) === 이이와의 악연 === 이준경이 말을 까칠하게 했다는 기록은 많아도 특별히 누구와 대립했다는 기록은 없는데, 유달리 이이와는 사사건건 대립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이나 기대승이나 둘 다 이준경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재미있게도 이이와 기대승 역시 서로 호의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적어도 이이는 기대승에 대해 도량이 넓고 재주가 있지만 오만하고 사류와 불화한다고 평가했다.], 이준경도 둘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이이의 <경연일기>에는 이이 - 기대승 - 이준경이 서로를 각각 별로 좋게 생각하지 않은 정황이 그대로 드러난다. 을사 위훈 삭제의 문제로 이이와 대립하자 화가 난 이준경이 백인걸에게 이이의 욕(...)을 하기도 했다. 백인걸은 이이를 추천한 인물인 동시에 이준경과도 친구 사이였는데, 이이는 백인걸이 기는 세고 학문은 거칠다고 대놓고 깠다.[* 당시 이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백인걸의 추천으로 정계에 입문한 상태였고, 심지어 백인걸은 명종 연간에 을사 사화의 폭풍 속에서도 지조와 절의를 지킨 정치 역정으로 중외의 상당한 존경을 받고 있었다.] 을사 위훈의 삭제를 아주 조심스럽게 진행하려던 이준경 앞에서 이이가 대놓고 두 번이나 이준경을 까버리자 빡친 이준경이 친구인 백인걸에게 "자네가 추천한 이이는 언행이 왜 그렇게 가벼운가?"라며 짜증을 냈다고 한다. 반면 이이는 경연일기에서 "작정하고 덤벼도 모자랄 텐데 저렇게 어중간하게 나서니 7달을 물고 늘어져도 못하지 ㅉㅉ"하는 식으로 깠다. 다만 양자간 사회적 지위와 권력의 차이 등을 생각해보면, 이준경이 어지간히 빡칠 만한데도 친구한테 짜증 부리는 것으로 끝냈다는 건 오히려 이준경의 대인배스러움을 증명하는 걸지도. 이준경의 유소 중 '사당의 조짐을 경계하라'는 부분은 정계에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는데, [[이이(조선)|이이]] 역시 "원래 사람은 죽음에 이르면 그 말이 선해지는 법인데, 이준경은 그 말이 악하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그의 유소는 실제로 나타나고 만다. 이이는 경연일기 중 이준경 사망 기사에서 이준경과 형 이윤경을 대비시키면서 몇 가지 일화를 드는데, 묘하게도 이렇게도 볼 수 있고 저렇게도 볼 수 있는 사건들을 기록하며 이윤경을 추켜세우고 이준경을 깎아내리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리고 이준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총평했다. >네 임금을 모신 원로신으로 몸가짐을 청백하게 하고 일하는 데 굳세며 권간을 내쫓고 성군을 섬겨왔으니, 누가 어진 재상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다만 그가 거만하여 혼자만 똑똑하다 하고 선비에게 굽히지 않으며 선비들과의 사이에 말썽이 쌓이고 끝내는 나라 망할 말로 임금을 그르쳐 놓아서 명예를 잃었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이이가 관직에 막 진출하던 무렵, 이준경은 어느덧 기로소에 든 나이 지긋한 노신에 원임 정승, 선조를 옹립하여 정국을 안정시킨 권력의 최정상이었는데도 여전히 독설가에 여전히 까칠하며 거침없이 정국을 주도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정치적 쟁점에 있어서는 여론에 함부로 휩쓸리지 않고 신중한 태도로 논의의 고삐를 늦추기도 했다. 반대로 이제 막 정치에 입문하던 이이는 옳은 것은 곧 죽어도 옳은 것, 그른 것은 곧 죽어도 그른 것이라는 딱 부러지는 태도로 적도 많았고 이후 붕당을 중재하는 모습은 상상도 못할 정도로 언행에 거침이 없었다. 똑같이 거침없고 직설적인 양쪽의 성격에 한 쪽은 권력이 있으면서 신중하고, 한쪽은 거칠 것이 없는 당대의 스타였다는 점이 필연적으로 충돌을 불러왔다고 볼 수도 있겠다. 이준경과 이이가 대립한 근본적인 부분은 [[붕당]]의 인정 부분인데, * 이준경은 훈구파는 이미 세력을 잃었고, 사림 내부의 붕당이 문제가 될 가능성이 높으며, 여기에는 이이와 같은 인물이 크게 역할을 할 것이다라고 봤다. * 이이는 붕당이라고 해도 모두 사림에서 비롯된 군자당이므로 문제가 되지 않으며, 훈구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붕당을 언급하는 것은 적전 분열과 마찬가지라고 해석했다. ~~자기가 붕당 문제의 주력이 될 것이다라고 언급된 것도 걸렸겠지.~~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준경의 완승이다. 애초에 붕당이 발생한 것 자체가 훈구파는 끝났다고 판단해서, 그 이익을 차지하기 위해서 내부 분열이 발생하는 것이었다. 자신이 훈구파 잔당을 처리했던 이준경은 이 상황을 파악한 것이다.[* 확실히 당시 조정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정계분위기를 알고 있었던 이준경의 의견이 이후에 진행과정을 모두 살펴보면 맞다. 그러나 이 붕당의 시작인 宋代에 --포장이 무척 잘 된--붕당의 기록은 군자와 소인당이 아닌, 군자당끼리 의견차이로 발생되는 것은 국가발전에 유익하게 볼 여지가 있었다.--당장에 영국 의회가 오랫동안 취하여 온 양당제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이에 율곡이 서책에서의 조화로운 붕당에 대한 이상이 있었다면 곧 죽을 사람이 붕당에 대하여서 비판한다는 것을 좋게 생각하지 않을 수는 있다.] 실제로 훈구파는 사림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전부터 소멸하고 있었고, 이준경 등이 조정에 들어간 것은 사실상 이 사실의 확인이나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이준경이 사망하는 시점에서 이이의 활동은 붕당의 분열을 가속시키고 있었는데, 단적으로 이준경의 유언을 비판하고 처벌을 주장한 이이는 후일의 동인이 되는 이들에게 극딜을 당하게 되는데, 이는 동서 분당이 뚜렷해지는 과정이었다. 결국 이준경이 사망하고 동서 분당이 누가 봐도 뚜렷해지자, 이이는 이준경의 말이 옳았음을 인정하고, 크게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이후 이이는 1575년 을해당론을 시작으로 동서 붕당을 중재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오히려 스스로 뿌렸던 초년기의 활동 때문에 붕당에 휩쓸려서 처벌받지 않으려면 붕당을 형성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어서 사실상 서인의 영수 취급을 받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이 과정을 현대에 보는 입장에서는 이이가 초년기에 벌였던 상당수의 뻘짓 중 하나이지만, '''이이의 제자인 서인의 입장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이의 글에서 이준경이 나쁘게 기록되어 있기도 하지만[* 사실 이이의 글을 보면 좋게 묘사된 인물이 없다.], 이준경을 비판하지 않으면 이이가 욕을 먹는 상황이 되면서 이준경은 성인을 알아보지 못하고 비난한 인물로 비판을 받거나, 혹은 언급 자체가 잘되지 않는 인물이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