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준경 (문단 편집) === 일화 === * 수완에 능하고 말을 거침없이 하는 실리파인 이준경은 강직하면서도 의리를 지킨다는 평을 들은 형 이윤경과 성격이 상당히 달랐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당시 분위기로는 형에 대한 평가가 더 높았다.[* 동생보다 일찍 죽어서 애석함을 샀다고 하는데, 나름 65세까지 살면서 병조 판서, 평안도 관찰사를 역임했고 한 시대의 명신으로 이름을 남겼다. 문무를 겸비해서 [[을묘왜변]] 때에도 종군해 [[영암]]에서 왜구에게 결정적 타격을 입혔던 인물이다.] 이를 잘 나타내는 일화가 있다. 을사 사화 이후 이어진 이덕응의 무고 사건에서 친 조카[* 이윤경의 아들. 이준경 입장에서 친조카라는 뜻이다.]인 이중열이 이덕응의 친구로 같이 엮여들어가자 이중열이 이들 형제에게 조언을 구했는데, 아버지였던 이윤경은 '''친구의 의리를 배신할 수 있겠느냐?'''고 답한 반면 이준경은 '''당장 고발해야 네가 살 수 있다'''고 답한것. 결국 이중열은 이윤경의 말을 따랐다가 연좌되어 자신은 사약을 받고 이윤경, 이준경 형제는 귀양을 갔다가 이준경은 1년 뒤, 이윤경은 3년 뒤에 풀려난다. 이이의 경연일기에도 전해지는 두 가지 일화 중 하나. * 경연일기에 전해지는 또 다른 일화는 을묘 왜변 진압 당시의 일이다. 호조 판서였던 이준경은 도순찰사로 임명되어 호남으로 내려갔는데, 당시 전주 부윤이 형 이윤경이었다. 영암성이 함락되자 이윤경은 당시 즉각 영암성 지원에 나섰는데 이준경은 이윤경에게 전황이 불리하니 나주의 순찰사 본진으로 합류하라는 전언을 보냈다. 경연일기에는 이윤경이 영암성을 사수하겠다고 답하고, 정말로 영암성 사수에 성공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어쨌든간에 두 일화는 양면적으로 해석할 여지가 충분한데, 이윤경을 긍정한다면 이윤경이 도학군자이고 이준경은 수완은 좋되 다소 음험하다고 평할 수도 있다. 반대로 이준경을 긍정한다면 이윤경은 고지식하고 이준경은 수완이 좋다고 할 수도 있다. 경연일기에는 이윤경을 긍정하고 이준경은 다소 비난하는 뉘앙스로 기록되어있다. * 명종 사망 당시 명나라에서도 [[가정제|황제]]가 사망하고 [[융경제|새 황제]]의 등극 조서를 반포하기 위해 사신이 입국해있던 상황이었다. 이들은 가산에 이르러 명종이 승하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통역관에게 나라 안의 상황에 대해 캐물었다. 통역관은 이들이 왕이 자식을 두었는지 묻자 세자가 일찍 죽고 다른 후사도 없다고 답하고, 수상이 누구냐고 묻자 "수상은 이준경인데, 나라 사람들의 신임을 받고 있다"고 답했다. 이준경의 인망이 상당했음을 알 만한 대목. [[http://sillok.history.go.kr/id/knb_10007017_001|실록의 해당 기사]] * 본인의 까칠함을 본인도 인정하고 있었던 모양. 명종이 순회 세자의 원자 보양관으로 임명하자 "전혀 온화하고 부드러운 기색이 없어, 평소 집안에서도 아이들이 모두 꺼리고 두려워하여 피하므로 친근히 대하지를 못합니다."라며 사양했다. 물론 겸양이 미덕인 시대이긴 했지만, 보통 사양하는 상소에서는 '성품이 우매하고 학문이 보잘것 없다'는 이유를 구구하게 들기 마련인데 특이하게도 '''"제가 쫌 까칠해서 우리집 애들도 저를 무서워함여"'''라는 이유를 댄 것. [[답정너|물론 명종은 이준경의 사양을 들어주지 않았다.]][[http://sillok.history.go.kr/id/kma_11103023_001|실록의 해당 기사]] * 임진왜란과 관련한 설화도 하나 전해진다. 이준경의 집에 피씨 성을 가진 청지기가 하나 있었는데, 대감 마님에게 자기 사윗감을 점지해주십사 청했다. 이준경은 며칠동안이나 돌아다니다가 청지기에게 남대문 밖에 있는 사람을 데려다 사위로 삼으라고 일러준다. 청지기가 가보니 거기 있는 남자는 형편없는 몰골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슨 생각인지 이준경은 죽기 전 이 청지기의 사위에게 자기 자식들을 간곡하게 부탁하고, 자손들에게도 어떤 일이든 그의 말을 따르라고 유언한다. 이준경이 죽은 뒤 이 사위는 사업을 해보겠다고 재산을 타내어 탕진하기를 반복하고, 이 짓을 몇 번이나 하며 재산을 싸그리 탕진하고, 식구들 울화통에 불을 지피더니 결국 남들 보기 우세스러우니 이사를 하자고 주장한다. 결국 이준경 일가는 청지기 사위를 따라 이사까지 하는데, 그를 따라가 보니 깊은 산골에 호화로운 마을이 있어 3년을 안락하게 살았다. 어느 날 이준경의 자손이 '서울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자 말없이 산 꼭대기로 올라가 도성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데 도성은 왜군에게 점령되어 불타고 있었다.식구들은 그제야 이준경이 점지한 청지기 사위가 혜안이 있어 사업이 망했다고 속이고 그 돈으로 이 피란지를 세웠음을 알고 거기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안락하게 살다가 서울로 돌아왔다고 한다. * 청렴함으로 유명해서, 청탁을 재치있게 거절한 일화도 내려온다. 평안 감사로 재직할 당시 [[윤원형]]이 그에게 무관직 인사를 청탁한 일이 있었다. 대놓고 면박주며 거절할 경우 화를 입을 것을 고려해 수를 썼는데, 아전에게 청탁의 당사자를 데리고 올 때 감영 내를 빙빙 돌다가 오게 한 것. 남자를 보고 이준경은 "이 동헌이 어느 방향이냐"고 물었는데, 평양 감영 같은 큰 관아를 한참이나 빙빙 돌다가 온 남자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자 "대감이 추천한 인사가 동서남북을 분간 못하는 사람이라 쓸 수가 없다"는 이유로 인사 청탁을 거절해버렸다. * 비슷한 일화가 하나 더 있는데, 이번엔 아들에 관한 것. 이준경이 어느 날 홍문관의 인사 추천 명단에서 자기 아들 이름을 발견했다. 이준경은 그 자리에서 아들 이름 위에 취소선을 북 그어버렸는데, 주변에서 묻자 "내 아들 놈이라 아는데 내 아들은 이런 자리를 맡기에 부족한 사람"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일화도 하나 전해진다. 구한 말에 쓰인 것으로 보이는 <이순신세가>라는 기록에 이준경이 이순신의 중매를 섰다는 내용이 남아있다. 이순신은 14세 ~ 15세 무렵 글방을 열어 [[자치통감]]을 가르쳤는데, 이준경이 지나가다가 이순신이 <여후> 편을 강론하는 것을 들었다. 이준경은 나중에 보성 군수 방진이 사윗감을 찾는 것을 알고 이순신을 소개해주었고, 이순신은 방진의 딸 방씨와 결혼하게 되었다는 이야기. 다만 <이순신세가>의 신빙성에 한계가 있고, 사실이었다고 해도 세세한 부분은 잘못 전해졌을 가능성도 있다. 이준경, 이순신의 조부 이백록, 방진의 부친 방국형은 1522년 임오년 생원시에 함께 급제한 동방(同榜)이었기 때문에, 지나가다가 알게 되어 중매를 섰을 가능성보다는, 친분 있는 사이에서 이준경이 중매를 했거나, 이백록과 방국형이 직접 혼담을 상의했을 가능성이 높다.[* 과거 합격이 매우 어렵기 때문에 동방은 현대의 대학 동기동창보다 더 끈끈한 일생의 인맥으로 남았으며, 대과의 경우 급제자는 모두 시험관의 동문 제자로 간주되었다. 생원시의 경우 대과보다는 상대적으로 쉬우나, 생원시 동방은 대부분 그대로 성균관 입학 동기가 되기 때문에 역시 대단히 밀접한 관계였다.] 방진의 묘비에도 이준경이 중매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한다. [[http://www.tycitu.com/pbbs/bbs/board.php?bo_table=b_05_04&wr_id=114|출처]] * 선조를 보좌한 원로대신이기도 하지만 선조와 인척관계로도 엮이는데, 이준경의 조부 이세좌의 형인 이세걸의 딸이 정세호[* 정인지의 손자이기도 하다.]와 혼인하여 낳은 딸이 바로 하동부대부인 정씨이다. 즉 이준경에게 선조는 7촌 재종질뻘에 해당하는 셈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