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준구(태권도) (문단 편집) == 기타 == * [[https://www.taekwonmaru.com/2510750|인터뷰]]에 의하면 미국에 이민을 가서 태권도 도장을 차릴 당시, 근처 일본 무술 도장 사범이 [[도장깨기]]의 일환이었는지 어쨌는지 도전해오기에 발차기 몇 방에 넉다운시켰다고 한다. 다만 기사에 따라서 가라테 사범이란 말도 있고 유도 사범이란 말도 있고, 패배를 인정하곤 도장 문을 닫고 이사를 갔다는 소리도 있고 한편으론 이후에도 연을 맺어 학생들도 보내주고 교류했다는 소리도 있는 등 여러 말이 나오는 모양. 유도, 가라테 둘 다 하던 사범이었을 수도 있다. 참고로 태권도와 가라테는 의외로 해외 진출 시기가 비슷하며 비슷한 뿌리를 갖고 있고 둘 다 일본 본토의 무술이 아니라는 동병상련을 겪고 있었기에[* [[가라테]]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가라테는 본래 중국 남파권법이 오키나와로 전래되어 독자적으로 어레인지된 무술로, 심지어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기 전까지는 오히려 일본 본토에서 깡패, 불한당들이나 배우는 무술로 천대받았었다. [[검도]], [[스모]], [[아이키도]], [[유도]] 등이 일본에서 상대적으로 일찍 인정받았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당시 해외에선 서로 간의 교류를 통해서 홍보를 하는 경우가 많았지 딱히 적대적으로 대하지는 않았다. * [[이소룡]]이 한국식 [[김밥]]을 무척 좋아했다고 증언한 사람도 이준구다. 어린 나이에 미국으로 건너와서 여러 잡일하면서 가난에 시달리던 이소룡이 배고픈데 밥값이 없으면 종종 찾아가서 이준구에게 밥을 얻어먹곤 했다고 한다.[* 이소룡은 이준구를 만났던 가라데 대회에서 합기도 고수 지한재의 술기를 보고 감탄해 몇가지 술기를 배우는 등 한국 무술가들에게 친화적이었다.] * 형태가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초창기 태권도 역사 속에서 바로 미국으로 간 인물이다 보니, 말년까지도 형식에 있어선 꽤 유연한 자세를 고수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창안한 소위 '준리 태권도'는 국내 태권도와 수련방식에 차이가 있는데, 주먹도 실전성을 가미해 권투 비슷하게[* 완벽하게 같진 않고 본인 주장에 따르면 예비동작이 있는 복싱 타격법에서 더 진화한 형태(무신호 펀치)다. 그는 태권도에 자부심이 있지만, 현대 태권도식 품새 수련은 실전에 별 도움 안되는 미련한 행동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개량하고 마케팅적 측면에서도 댄스 스포츠를 빨리 도입하는 등, 꽤 선구적인 지도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손기술 쓸 수 있게 올림픽 태권도 룰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는데, 덕분에 국내 태권도계와는 소원한 편이었지만, 이런 마인드 덕분에 더 현지 친화적인 모션도 많이 구사할 수 있었고, 이는 태권도의 미국 현지 정착에 도움이 되었다. 세계 무대에서 태권도의 정착에 큰 공헌을 했다고 평가받는다. [각주][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이준구, version=132)] [[분류:태권도 관련 인물]][[분류:대한민국의 태권도 선수]][[분류:대한민국의 무술인]][[분류:대한민국의 남성 기업인]][[분류:미국의 태권도 선수]][[분류:미국의 남성 무술인]][[분류:미국의 남성 기업인]][[분류:한국계 미국인]][[분류:미국으로 귀화한 인물]][[분류:1932년 출생]][[분류:2018년 사망]][[분류:아산시 출신 인물]][[분류:동성중학교(서울) 출신]][[분류:텍사스 대학교 출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