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징옥 (문단 편집) == 상세 == 무력만으로 놓고 보면 전조인 '''[[고려]]의 [[척준경]]과 함께 [[한국사|한국 역사상]] 최강으로 불리는 인물''' 중 하나로[* 거기다 두 인물 모두 다 [[여진족]] 토벌에 혁혁한 공이 있다는 것도 같다.] 입소문으로 전해지는 [[야사(역사)|야사]]에 그 초인적인 용력이 잘 나타나 있다. 그 형 이징석과 동생 이징규[* 그런데 이 둘은 계유정난 때 세조를 지지했다.]도 당대에 무인으로서 3형제가 모두 용명을 떨쳤다. 병든 [[어머니]]가 이징석과 이징옥을 불러 ~~뜬금~~ "내가 '''살아있는''' [[멧돼지]]가 보고 싶다."고 말하자 이징석은 멧돼지를 쏴서 생포한 뒤 갖다드렸는데, 이징옥은 '''더 큰 멧돼지를 몇 날 며칠을 쫓아다니며 집 앞마당까지 몰아와서 기진맥진해 뻗어있는 걸 어머니께 보여드렸다.''' 이것도 모자라서 [[호랑이]]를 10대 시절에 맨손으로 잡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물론 야사니 너무 신뢰하지는 말자.[* 다만 사냥감을 탈진할 때까지 추적하는 [[지구력]] 사냥법은 실제로 있는 사냥법 중 하나다. 자세한 것은 [[사냥#s-9.1|사냥]] 항목 참조.] 그리고 덩치가 커서 여진족들에게 어금니가 있는 큰 돼지라고 불렸고 청렴하였다.[[http://www.usjournal.kr/news/newsview.php?ncode=179513592900364&dt=m|출처]] [[세종대왕|세종]] 시대부터 북방에서 근무하여 [[여진족]]을 상대로 용맹을 떨쳐 여진족들의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김종서(조선)|김종서]]의 눈에 띄어 북방 정벌을 하는 데 도움을 줬는데, 이때 김종서는 [[총사령관]] 역할을 수행했고 직접 전장에 나가 여진을 몰아내는 데에는 이징옥의 노련한 무력이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런데 사실 김종서가 처음 북방에 부임했을 때 둘의 대(對)여진관은 달랐다. 김종서는 문신 출신답게 다소 온건책을 주장했고, 이징옥은 강경 토벌을 주장했다. 이징옥은 군사적으로 강하게 제압하지 않으면 결코 여진의 저항을 물리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때문에 여진족은 이징옥을 멧돼지라 불렀다-무식하게 힘만 쓰는 놈으로 비하하기 위해.] 그러나 김종서도 몇 년 후에는 이징옥의 의견을 수용하여 강경 토벌론으로 돌아서게 된다.[* 중앙의 세종과 황희 같은 정승도 웬만하면 전면적 군사 행동은 자제할 것을 주문했지만 여진의 침입이 지속되자 필요에 따라서는 적절히 군사 행동을 하라고 지시했다.] 그래서 1440년 이후로는 적절한 군사 시위와 적지에 침투하는 작전까지도 구사한 끝에 [[함경도]]의 [[4군 6진|6진]]이 완성되어 [[두만강]] 이남은 완전히 조선의 영역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6진은 [[종성군]]·[[온성군]]·[[회령시]]·[[경원군]]·[[경흥군]]·[[부령군]]의 여섯 진이다. 이곳은 현재도 군청 소재지일 정도로 큰 읍이 되었다.][* 다만 이런 김종서의 강경 방향은 세종이 원하는 방향이 아니라서 김종서는 해임되는데 얼마 후 [[형조판서]]에 오른다.] 세종 시대에는 [[명나라]] 사신[* 당시 조선에 사행을 온 명나라 사신은 주로 태감급의 [[환관]]들이 대부분이었다. 명나라는 강력한 황제 중심 체제를 지향했기에 환관들이 직급과 상관없이 측근 심복으로 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환관을 보냈다고 하여 조선을 낮게 본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조선에는 주로 조선 출신으로 환관이 된 자들이 사신으로 보내졌다.]들의 횡포와 수탈이 심했는데, 특히 명나라 사신이 오면 조선의 매인 '해동청'을 잡으려고 안달이었다. 사신으로 온 [[윤봉(조선)|윤봉]][* 이자도 조선 출신 환관이다. 세종 말년에 조선이 [[조공]]품에서 금과 은이 빠지게 되는 큰 역할 해 주었다. 물론 받아먹은 게 너무 많은 덕이 크지만 다른 사신들처럼 여러 물품은 기본이요. 여기다가 동생을 재상급에 앉히고 은퇴하면 조선에서 살겠다고 집과 땅까지 뜯어냈다.]이라는 자가 해동청을 제멋대로 잡고 남의 집 사냥개를 빼앗자 이징옥은 몰래 개를 주인에게 돌려주고, 잡은 해동청을 풀어줘 버렸다. 윤봉이 이를 가지고 난리 치자 '''"저거 그냥 [[잡종]]이에요"'''라고 둘러댔다. 어쨌든 이 일로 [[유배]]를 가기도 했다.[* 뜻밖에도 윤봉이 직접 이징옥의 사면을 요청하여 귀양 정도로 끝난 것인데, 윤봉의 입장에서는 일이 너무 커지면 물의를 일으킨 책임으로 자신도 처벌받을 수가 있기 때문에 그랬으리라는 추측이 있다.(이것 저것 많이 챙길 수 있는 조선 사신의 자리는 인기 있는 보직이었다.) 이징옥이 이런 부분까지 계산했던 것인지는 모를 일이다.] 자칫하다간 외교 문제로 비화될 수 있는 사건이었다. 이 사건 때문에 조정에서는 말 그대로 골머리를 앓았다. 세종도 '''매랑 개 한 마리 때문에 이게 뭔 꼴이냐'''라고 이징옥을 깠고, [[맹사성]]이나 [[허조]]는 이 일로 '''이 사실이 명나라에 알려지면 뒷감당을 못 한다'''고 처벌을 반대할 정도의 사건이었다. 의기 있는 사람이었던 건 사실이지만 대국적으로 처신하는 안목은 부족했던 모양. 어쨌든 이 일로 10년 넘게 지키던 경흥을 떠나 2년 동안 썩었다. 매우 청렴하고 성실한 인물이었는데, [[세종대왕|세종]]부터 그 뒤인 [[문종(조선)|문종]], [[단종(조선)|단종]]을 거치며 일생 동안 북방에 수십 년간 근무했는데도 불만 하나 없었으며, 본인은 매우 청렴하여 보다 못한 부하 무관이 "우리 장군님께서는 추운 겨울에도 '''겨울날 입을 옷이 한 벌밖에 없어요'''"라고 문종에게 직소했을 정도. 이에 문종은 좋은 털옷을 이징옥에게 보내주기도 했다. 그리고 부친상을 당했을 때 장지 문제로 형과 충돌하기도 했는데[* 아버지가 북쪽 산에 묻어달라고 했는데 이징석은 그곳에 자기 땅이 많다는 이유로 다른 곳에 묘를 쓰려 했다. 이징옥은 그래도 아버님 유언을 들어드려야 하지 않겠느냐고 반대했다. '''그러니까 저 형이란 놈이 지 땅이 탐나서 아버지 유언을 어기겠다는 천하의 불효막심한 짓을 하려 했다는 것.'''(원하는 곳이 흉지라면 옮겨도 아무 말이 안 나오겠지만 흉지라는 언급도 없다.) 거기에 이놈은 막내동생하고 같이 계유정난에 동조했다.] 열 받은 형 이징석이 이징옥을 아버지 빈소에서 두들겨 패기도 했는데,[* 현대에 와서도 부모 빈소에서 이런 짓 하면 욕먹는 것을 넘어서 [[형사처벌]]까지 받을 수 있는데, 조선 시대면 당연히 [[패륜]]이 맞다.] 이 북방에서 여진을 떨게 한 용장은 형이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폭력을 행사했음에도 불구하고 형에게 폭력을 휘두를 수 없다는 이유로 '''그냥 맞고만 있었다.''' 그리고 며칠 동안 앓아 누웠다가 겨우 일어났다고. 조선 초의 관리들이 여러 문제로 스캔들에 깨끗했던 인물들이 거의 없었던 데 반해 이징옥은 이렇듯 사생활이 매우 깨끗했다.[* 야사를 통해 청백리로 익히 알려진 [[황희(조선)|황희]]마저도 실제로는 부정부패가 있었는데 이 정도면 정말 대단한 거다. 그 외를 들라면 4군 개척에서 활약한 명장 [[최윤덕]]과(이 시대 무장들의 유행(?)인 폭행 사건조차 없어서 무신들을 무시하는 문신들도 그를 존중했다.) 보수적이고 꼬장꼬장하기로 유명했던 재상 [[허조]] 정도.] [[세종대왕|세종]]과 [[문종(조선)|문종]]이 승하하고 [[단종(조선)|단종]]이 즉위했을 때에도 북방에서 근무했다. 비록 당시 실권자인 김종서의 신임을 얻기는 했지만, [[토목의 변]]과 이만주 때문에 북방이 혼란스러워 계속 북방을 맡긴 것으로 추정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