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창호(배구인) (문단 편집) === 지도자 경력 === 1968년, 한의사로 일하던 이창호는 국세청 배구단이 창단되자 운영 주체인 국세청장 이낙선의 제의로 배구계에 복귀하여 코치로써 박만복 초대 감독을 보좌했다. 당시에는 김영자, 문경숙 선수가 중심인 제일은행[* 1967년에 창단했으나 2년만인 1969년에 해체된 뒤 선수단은 선경으로 인수되어 선경합섬-선경인더스트리-SK케미칼로 이어지다 1998년에 해체되었다.]과 서한숙, 서현숙, 이경선 등이 중심이 된 산업은행[* 1977년 해체 이후 선수단은 신생팀인 [[수원 현대건설 힐스테이트|현대건설]]에 인수되었다.]이 배구계를 독점한 상태였고, 이러한 상황에서 숭의여고와 중앙여고 졸업생을 중심으로 창단한 신생팀 국세청은 실업연맹전 첫 경기에서 0-3으로 졌지만, 이후에도 더욱 분발하여 결승에서 제일은행과 만나 3-0으로 이겨 금세 우승을 차지, 이후 2차 실업연맹전에서부터 연승기록을 시작하여 1980년까지 이어갔다. 이는 단장인 조사국장이나 징세국장인 이철승, 장태명 씨 등이 단장, 중부 세무소장 차영복 씨가 매니저 겸 부단장을 맡아 막강한 지원을 했고, 팀이 이길수록 우수한 선수들이 줄줄이 들어오다 보니 스카우트를 할 필요가 없던 점도 한몫했다. 1969년부터는 박만복 감독이 [[인천 대한항공 점보스|대한항공 배구단]] 창단으로 팀을 떠나자 후임인 최이식 감독 옆에서 일하며 그 해에 막 해체된 제일은행의 에이스 김영자를 영입한 것을 필두로 1970년에 [[조혜정(배구)|조혜정]](숭의여고)과 윤영내(덕성여고)를 영입했고, 감독직에 부임한 1975년에 김화복, 1979년에 [[이운임]], 유용순, 1980년 이명희, 1981년 김옥순, 1982년 [[박미희]](현 흥국생명 감독) 등의 우수한 선수를 연속으로 보유한 [[미도파 배구단|미도파]]는 1980년까지 여자 배구 역사상 전무후무한 성적인 '''181연승'''을 기록했다. 그러나 1980년 광주 전국종별선수권대회에서 당시 약체인 선경합섬과의 경기 전에 주전인 김화복이 몸을 푸는 도중 공을 잘못 밟아 부상당한 게 화근이 되어 이때 이운임 등 초년병들을 대거 투입했는데 1세트를 18-20으로 내주고, 상대 사기가 오르면서 2세트도 내주고 3세트는 듀스 접전을 벌였지만 결국 0-3으로 지면서 181연승에서 멈추었다. 이후에도 승수를 계속 쌓아 [[수원 현대건설 힐스테이트|현대]]와 라이벌 플래그를 형성하여 1983/84 시즌 첫 대통령배 전국남녀배구대회에서 첫 우승을 차지했고, 이후 현대와 우승컵을 다투면서 1987년에도 두 번째 타이틀을 차지했다. 이렇다 보니 1980년대에 국가대표팀 감독 자리까지 현대와 미도파 양팀 감독이 번갈아 차지하기까지 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그는 국가대표팀까지 맡아 [[1984 LA 올림픽]]에서 동메달, [[1990 베이징 아시안 게임]]에서 은메달을 차지했다. 그간의 공적으로 1981년에 모기업인 미도파는 감독인 그를 이사 자리에 앉히기도 했다. 이후 그는 감독 생활을 병행하며 상무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1989년에 이명희, 김옥순, 이운임이 은퇴하고 1990년에 [[박미희]]까지 은퇴하면서 미도파 왕조는 쇠락의 길로 접어든다. 1980년대 후반부터 약진한 현대와 호남정유에 밀려 미도파는 주선진, 강신정, 박복례 등이 부상 등으로 제 역할을 하지 못하여 과거의 영광을 잃고 중하위권으로 전락하다 1994년에 해체되어 선수단은 효성 배구단에 인수되었고, 이창호 감독도 이들을 따라 감독이 되었다. 그러나 효성에서의 활약은 별 볼일 없었고, 결국 이창호 감독은 1996/97 시즌 슈퍼리그 도중에 지휘봉을 내려놓아 29년간의 지도자 생활은 끝을 고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