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처운 (문단 편집) === 북송 시기 === 북송이 들어선 뒤 조광윤의 즉위에 불만을 품은 택로(澤潞)의 [[이균]]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처운은 이균을 평정할 때 종군하여 우림대장군(羽林大將軍), 선휘북원사(宣徽北院使)로 승진하였고 행영병마도감(行營兵馬都監)으로 임명되어 [[이중진]]을 토벌할 때 종군하였으며, 이중진이 평정되자 지양주(知揚州)로 부임하였다. 이균과 이중진의 반란을 진압한 뒤 양주 경내가 쇠약해지자, 이처운은 민심의 안정에 힘쓰면서 성 안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집세를 감면해달라고 상주하였으며, 백성들이 모두 기쁜 마음으로 따랐다. 962년, 수도로 돌아갈 때 늙은이와 어린이를 불문하고 이처운이 수도로 돌아가는 길을 막고 눈물을 흘려서 여러 날 동안 떠나지 못했다. 뒤에 선휘남원사(宣徽南院使) 겸 추밀부사(樞密副使)로 임명되고 저택을 하사받았다. 963년, 낭주(朗州)에서 군란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모용연조에게 군대를 이끌어 낭주의 군란을 진압하도록 명하고 이처운을 도감으로 삼았다. 당시 태조가 이처운에게 직접 방략을 전수했고 한수(漢水)에서 합류하도록 명했다. 모용연조와 이처운을 파견하기 직전, 조정에서는 내주방부사(內酒坊副使) [[노회충]]을 [[남평]]에 사자로 파견하여 남평의 정세를 살피게 했으며, 노회충이 돌아와 남평을 공략할 수 있는 형세라고 상주하니 마침내 이처운에게 남평을 도모하도록 명하였다. 이처운은 양주(襄州)에 이르러 먼저 합문사(閤門使) [[정덕유]]를 보내 [[정명가도|남평에 길을 빌리도록 하고]] 섶나무와 물을 송군에 지급하도록 청했으나 남평의 [[고계충]]은 백성들이 두려워한다는 이유로 사양하며 백 리 밖에서 식량과 마초를 공급하도록 청원하였다. 이처운이 다시 정덕유를 보내 고계충에게 권유하니 이에 비로소 이처운의 청원을 따랐다. 이처운은 뒤에 군중에 다음과 같이 명했다. >강릉성(江陵城)에 입성한 뒤 지정된 길을 따르지 않거나 무단으로 민가에 침입하는 자가 있다면 참수하겠다! 송군이 형문(荊門)에 도착한 뒤 고계충은 숙부인 고보인(高保寅)과 군교 양연사(梁延嗣)를 보내 쇠고기와 술을 송군에게 바치며 이처운의 군대를 위로하고 또한 송군의 정세를 정찰하게 했다. 이처운은 고보인과 양연사를 후하게 대접했으며, 다음날 그들에게 남평으로 먼저 돌아가라고 명했다. 양연사는 매우 기뻐하여 사람을 보내 고계충에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알렸다. 형문은 강릉으로부터 1백여 리 떨어진 곳에 있었으며, 이날 저녁에 고보인 등을 불러 모용연조의 군막에서 술자리를 열었다. 이처운은 몰래 수천 명의 경기병을 보내 강릉으로 진군하게 했다. 한편 고계충은 단지 고보인과 양연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송나라의 대군이 당도하는 소리를 듣고 황급히 마중을 나갔다가 강릉에서 북쪽으로 15리 떨어진 곳에서 이처운을 조우하였다. 이처운은 고계충에게 읍하고 모용연조를 기다리도록 명했으며, 자신은 친병들을 거느리고 먼저 강릉성 북문으로 들어가서 강릉성의 요충지를 분할 점령했다. 고계충은 결국 이처운에게 항복했고 남평은 이렇게 멸망한다. 남평의 항복을 받아낸 이처운은 곧바로 강릉의 군졸 1만여 명을 징발하여 밤낮으로 낭주를 향해 달렸다. 또한 우선 장수들을 파견하여 휘하의 군대와 강릉의 군대를 나누어 악주(岳州)로 보내고 삼강구(三江口)에서 낭주의 반란을 진압하며 700여 척의 배를 노획하고 4,000명을 참수하였다. 이처운은 다시 예강(澧江)에서 장종부(張從富)와 조우하여 장종부를 물리쳤으며, 오산채(敖山砦)까지 추격하고 군란을 일으킨 군졸들을 사로잡았다. 이처운은 사로잡은 포로들 중 체격이 비대한 이들 수십 명을 풀어서 휘하 군인들에게 나눠 먹도록 명했으며, 젊고 건장한 포로들에게 묵형을 내려서 먼저 낭주로 입성하게 했다. 마침 날이 저물어서 오산채에서 머물다가 새벽이 되어 모용연조의 大軍이 뒤이어 도착하였다. 묵형을 받은 이들은 이처운의 명령대로 먼저 낭주에 입성하여 포로로 붙잡힌 이들이 모두 송군에게 잡아먹혔다고 알렸고, 낭주 사람들은 매우 두려워하여 성에 불을 놓고 달아났다. 당시 무평군절도사 주보권(周保權)은 나이가 아직 어려서 왕단(汪端)의 겁박을 받아 강남채(江南砦)의 한 절에 숨었는데, 이처운은 휘하 장수인 전수기(田守奇)를 보내 주보권을 사로잡았다. 이후 담주(潭州)로 입성하여 송나라는 형호(荊湖) 지역을 차지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