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천환 (문단 편집) == 생애와 업적 == 1922년 정읍에서 출생한 이천환 주교는, 1952년 부제품을, 1953년 사제품을 받고 상주성당에서 사제 생활을 시작했다. 1956년에 교구장 [[존 데일리]] 주교와 선교사 신부들의 추천을 받아 2명의 동료 신부와 함께 영국으로 떠나, 1959년 캔터베리 중앙신학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했다. 귀국 직후부터 1961년까지 성 미카엘 신학교 교수로서, 1961년부터 주교 임명 직전까지는 [[수동성당]] 관할사제로 사목하였고, 1965년 [[마이클 램지]] 캔터베리 대주교의 명을 받들어 [[서울교구장]]이 되었다. 서울교구장 승좌 당시는 한국인 사제 9명, 한국인 부제 1명이어서 여전히 선교사 신부들의 도움이 많이 필요했고, 서울이나 인천에서 사목한 경력도 없었기 때문에 주교 직무에 적응하는 데 애를 많이 먹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천환 주교가 승좌하는 즈음에 천주교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마무리 단계로 가고 있었고, 개신교계에서도 [[세계 교회 협의회|WCC]]를 중심으로 한 [[교회일치운동]]이 한창이었다. 이천환 주교도 이 점을 목격, 타 교파 신자들에게도 과감히 교회의 문호를 개방하고, 천주교, 루터회 등과 교류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등 교회일치운동에 동참했다. 한국인 사제 양성을 적극 추진하여 1970년경부터는 한국인 성직자 수가 선교사 수보다 많아지게 되었고, 평신도들의 전도 활동도 적극 장려했다.[* 대표적으로, 서울의 도봉성당은 평신도 신학 공부모임의 참여인원이 늘어 본당으로까지 성장한 케이스다.] 이 주교의 노력으로, 서울교구의 교세는 서울과 인천 밖에서도 점차 확대되어 나갔다. 또한, 임기중에는 [[NCCK]] 회장, 대한기독교서회 이사장, [[대한성서공회]] 이사장 등을 역임하며, 연합기구 운영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특히, 1972년부터 1997년까지 무려 25년간을 [[연세대학교]] 이사장으로 재임하며, 오늘날 연세대의 위상을 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무려 18년 6개월간 주교좌를 지킨 이천환 주교는 1983년 모종의 사건 때문에, 임기가 3년여 남아있었음에도 중도사임하고, 미국 [[버지니아 주]]에서 한인교회를 개척, 관할사제를 잠시 맡다가 귀국했다. 이천환 주교는 이후 모든 후배 주교들의 멘토로서 활약하다가, 2010년 3월 26일 노환으로 별세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