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춘재 (문단 편집) == 이춘재의 행적과 비교해 본 사건 시간표 == {{{#!wiki style="word-break: keep-all" || '''날짜''' ||<-2> '''사건''' || '''이춘재 행적 및 관련성''' || || [[1983년]] 중순||<-2>-||군 입대. 대략 20세|| ||<-4> '''[[1986년]]''' || || 1월||<-2>-||군 전역. 대략 23세|| || [[2월 8일]]||<|7> [[화성시|화성군]] 태안읍 일대 연쇄 강간 사건 ||1차, 발생 장소: 진안리.[* 범죄 프로파일러인 펫 브라운 박사는 연쇄 강간 사건과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은 동일범이라며 "저에게 범인이 어디 사는지 지목하라고 한다면 처음 강간당한 여자가 사는 곳 근처라고 말하겠어요"라고 말했다. 실제 이춘재는 사건 발생 장소인 태안읍 진안리에 살고 있었다.]||이춘재 진안리 거주|| || [[3월 20일]]||2차||-|| || [[4월 3일]]||3차||-|| || [[4월 25일]]||4차||-|| || [[5월 8일]]||5차||-|| || [[5월 14일]]||6차||-|| || 7월||7차||-|| || [[9월 15일]]||<-2>'''1차 살인'''[br]피해자가 저항한 흔적이 있음. [[프로파일러]] 펫 브라운 박사는 현장 자료를 보고 "이 사건은 살인 경험이 없던 강간범이 벌인 첫 살인 사건이다"라고 분석했다.||이춘재가 다니던 전기부품회사 출퇴근길 근처|| || [[10월 20일]]||<-2>'''2차 살인'''||이춘재가 다니던 전기부품회사 출퇴근 길 근처|| || [[11월 30일]]||<-2>범행 미수 생존자 발생. 진안리. 이때 당시 피해자가 거름통에 빠지자 범인이 더럽다며 도망감.[* 피해자는 정 아무개 씨이며 당시 38세 정도로 추정됨. 발생 날짜가 11월 19일이라고도 한다. 이후 3차 사건부터 결박 + 재갈이 기본적으로 나온다는 걸 생각하면 당시 미수자가 도망간 후 그 다음부터 범행 대상자를 제압하기 위해서 결박 + 재갈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이춘재 진안리 거주|| || [[12월 12일]]||<-2>'''3차 살인'''||피해자가 다니던 회사가 이춘재가 다니던 전기부품회사 옆이었음.[br]이춘재 DNA 확인.|| || [[12월 14일]]||<-2>'''4차 살인'''||피해자가 다니던 섬유회사(지금은 [[레미콘]] 회사)가 이춘재가 다니던 전기부품회사 옆이었음. 이춘재 DNA 확인.|| ||<-4> '''[[1987년]]''' || || [[1월 10일]]||<-2>'''5차 살인'''||이춘재 DNA 확인.|| || 5차 사건 이후||<-2>언론의 보도로 국민적 주목을 받고 대대적인 수사진이 꾸려짐.[* 만약 이춘재가 범인이라면 6차에서 시신에 결박이 안 된 것도 여기서 설명된다. 즉, 6차에서도 범행의 수법이 같으면 경찰들이 자신이 범인인 걸 확실시할 수도 있으니까 다른 수법으로 저질렀을 것.]||-|| || [[5월 2일]]||<-2>'''6차 살인'''||이춘재 집 근처|| || 7월||<-2>-||[[1986년]] 8월 발생한 성폭행 사건의 용의자가 이춘재라는 주민의 제보를 받아 이춘재 조사받음|| || [[12월 24일]]||<-2>[[수원 여고생 강간 살인 사건]][br][[수원시]] [[화서역]] 여고생 김모 피살.[* 3, 4, 5차와 흡사하게 입엔 재갈이 물리고 손이 결박된 채로 발견되었기에 화성 사건과 연관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졌다. 물론 해당 사건의 범인은 다른 사람이라고 강력히 주장하는 형사도 있다. [[http://ilyo.co.kr/?ac=article_view&entry_id=10022|관련 일요신문 기사]] 사실 [[화서역]]은 연쇄살인이 벌어진 [[화성시]] 태안읍과 상당히 떨어져 있기에 이 형사의 증언도 타당성이 있지만 이춘재가 [[수원시]] 소재 고교를 졸업했고 수원에 빈번하게 갔음을 감안하면 이춘재의 범행일 가능성도 더러 있다. 시신 발견 날짜는 1988년 [[1월 4일]]. 부검 결과 피살자가 가출한 1987년 [[12월 24일]] 밤부터 25일 새벽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이춘재는 수원 소재 고등학교를 졸업했음.|| ||<-4> [[1988년]] 이후 || || [[1988년]] [[9월 7일]]||<-2>'''7차 살인'''[br]용의자가 수원행 막차 버스를 탐. 버스 기사였던 강원식은 범인의 얼굴에 대해 "눈은 옆을 쪽 째지고 눈썹은 범 눈썹으로 해서 진했고 얼굴은 좀 길고 코가 좀 크고"라고 증언.[* 몽타주 참고]||25세 정도로 추정.[br]이춘재 DNA 확인.[br]과거 수원 S고등학교를 다녔음.|| || [[1988년]] [[9월 16일]]||<-2>[[이춘재 연쇄살인 사건/8차|'''8차 살인''']][br]진안리 피해자 집안.[br]현장에서 발견된 모발에서 티타늄 검출. 경찰은 모방 범죄라며 주민 윤 씨를 범인으로 체포[* 모발에서 티타늄이 나왔다는 것이 증거였다. 하지만 처음 범행을 자백한 윤 씨는 나중에 교도소에서 "나는 범인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이후 이춘재는 [[2019년]] [[10월 4일]] 모방 범죄로 결론지어진 8차 사건 이춘재 본인이 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서는 추가 조사 끝에 재심을 거쳐 윤 씨의 무죄가 확정되었고 국가배상금 25억 이상 지급이 결정되었다.], 윤 씨는 범행을 부인||티타늄은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검출될 가능성이 있다. 이춘재도 전기부품회사 공장에서 일했다.[br]사건 발생 장소인 진안리에 이춘재 거주.|| || [[1989년]] [[7월 3일]]||<-2>[[수원시]] [[권선구]] [[평동(수원)|오목천동]] 여고생 살인사건. 오목천동 601번지 농수로에서 발견.[[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9071000329214005|#]]||이춘재 집에서 약 6km 거리|| || [[1989년]] [[9월 26일]]||<-2>-||수원시 권선구 [[세류동]] 강도예비 및 폭력 사건으로 구금|| || [[1990년]] [[4월 19일]]||<-2>-||이춘재 풀려남|| || [[1990년]] [[11월 15일]]||<-2>'''9차 살인'''[* 전문가의 분석에 의하면 "강도예비 폭력 사건에 대한 분노 + 당시 [[등화관제]]로 목격자 부재 + 대상자가 20대 남성인 자신이 제압하기 쉬운 여중생이라는 3가지가 시너지를 일으켜서 제일 참혹한 비극이 되었다"고 추측했다.][br]피해자 김모(14)||이춘재 DNA 확인.|| || [[1991년]] [[1월 26일]]||<-2>[[청주 여공 강간 살인사건]].[br]가경동 택지공사 현장에서 발견.||이춘재는 정황상 이 시기에 이미 청주와 화성의 왕래가 잦았을 가능성이 있음.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909201214087964|#]] 청주 장기 미제사건 중 1번째 사건이다.|| || [[1991년]] [[1월 26일]]||<-2>청주 부녀자 납치사건[br]가경동 택지공사 현장으로 납치 된 피해자가 탈출||납치 피해자가 자신 외에 이미 납치된 사람이 있었던 것 같다고 증언했고 위의 청주 여공 강간 살인사건의 피해자로 추정.|| || [[1991년]] [[3월 7일]]||<-2>[[3월 7일]] 오후 8시쯤 청주시 남주동의 한 셋방에서 주부 김모(29세, 여) 씨가 살해당한 것을 남편이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김모 씨는 공업용 테이프로 눈이 가려져 있었고 스타킹이 입에 물려져 있었으며 양쪽 가슴에는 흉기에 찔린 상처도 있었다. 경찰은 금품이 그대로 남아 있는 점과 김씨의 방어흔이 없는 점, 범행에 사용된 도구 일체가 집 안에 남아 있는 점 등을 볼 때 면식범의 소행으로 추점하고 범인 추적에 나섰다. 하지만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된 몇몇이 명확한 알리바이를 제시한 데다 증거 부족 등의 이유로 용의선상에서 제외되면서 이 사건은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다.||범행 시기와 수법이 비슷하기 때문에 이춘재가 말한 가정주부 사건을 이 사건으로 보기도 한다. 청주 장기 미제사건 중 2번째 사건이다.|| || [[1991년]] [[4월 3일]]||<-2>'''10차 살인'''||-|| || [[1991년]] 7월||<-2>-||<-2>이춘재 결혼.[[http://news.jtbc.joins.com/article/article.aspx?news_id=NB11882637|#]][br]결혼 상대 여성은 [[청원군]] 부용면[* 지금의 [[세종특별자치시]] [[부강면]].]에 있는 골재회사의 경리였음. 따라서 이춘재는 이전부터 청주에 왕래가 잦았던 것으로 보임. 이 시기를 전후로 이춘재는 그녀가 근무하는 골재회사에 포크레인 기사로 취직했는데 취직이 먼저인지 여성과의 교제가 먼저인지는 확인 필요.|| || [[1992년]] 초반||<-2>[[4월 23일]] 오전 8시 20분쯤 [[청주시]] [[흥덕구]] 강내면(옛 청원군) 학천교 [[경부고속도로]] 확장 공사장에서 20~30대로 보이는 여성이 숨져 있는 것을 한 포크레인 기사가 신고했다. 30~40㎝ 깊이 땅속에서 발견된 여성은 알몸이었고 양손에는 [[스타킹]]이 묶여 뒤로 결박되어 있었으며 얼굴 곳곳에 둔기에 맞은 상처가 있었다. 폐의 상태로 봤을 때 하루 담배 1갑 이상을 피워 온 것으로 추정되었고 유흥업소 종사자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면서 수사에 나섰지만 피해자의 신원조차 파악하지 못했고 결국 미제사건으로 남게 됐다.||이춘재는 포크레인 기사로 일하고 있었다. 청주 장기 미제사건 중 3번째 사건이다.|| || [[1992년]] [[4월 18일]]||<-2>[[4월 18일]] 오전 8시 30분쯤 [[청주시]] [[흥덕구]] 봉명동의 한 음식점 주차장에서 이모(34세, 여) 씨가 숨져 있는 것을 지나가던 시민이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이모 씨는 머리에는 둔기에 가격당한 상처가 있었고 머리 옆에는 벗겨진 하의가 놓여 있었다. 당시 시체를 검안한 의사는 두개골 파열을 직접적인 사인이라고 했고, 사망 시간은 4월 18일 오전 12시로 추정했다. 경찰은 현장에서 발견된 신발 한 짝과 핸드백 등을 증거물로 확보하고 이 여성이 일하던 유흥업소 단골손님 중 1명이 범인일 것으로 추정했으나 수사에 진전을 보이지 못하면서 미제사건으로 남았다.||청주 장기 미제사건 중 4번째 사건이다.|| || [[1992년]] [[6월 24일]]||<-2>[[6월 25일]] 오후 5시 30분쯤 [[청주시]] 복대동 건물 안방에서 가정주부 이모(28세, 여) 씨가 숨져 있는 것을 주민이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이모 씨는 전화줄에 목이 졸려 있었고, 머리에는 4㎝ 정도 찢어진 상처가 있었다. 하의는 벗겨져 있었지만 성폭행 흔적은 없었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일어난 사건이라고 한다. 경찰은 이를 면식범의 소행으로 보고 당시 20대 초반으로 추정되는 남성이 사건 현장에서 나갔다는 목격자의 진술을 확보해 피해자와 남편 등 주변인을 중심으로 수사했지만 끝내 사건을 해결하지 못했다.||청주 장기 미제사건 중 5번째 사건이다.|| || [[1992년]]||<-2>청주 일대 연쇄 살인 사건 언론 보도. 당시 언론에서 "3개월 동안 살인사건 4건, 해결 기미 감감"이라는 기사가 나왔다.||이춘재는 청주에서 살고 있었다.|| || [[1992년]]||<-2>-||이춘재 아들 태어남|| || [[1993년]] 4월||<-2>-||서류상 주소지를 화성에서 청주로 옮김. 하지만 실제 청주에 거주한 시기는 [[1990년]]~[[1991년]]으로 추정된다.[[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909201214087964|#]]|| || [[1994년]] 1월||<-2>-||[[청주 처제 살인사건|처제 살인, 체포 수감]]||}}}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