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충희 (문단 편집) == 선수 경력 == 중학교 1학년 때부터 그냥 [[농구]]가 좋아서 선수 생활을 시작, 겨우 150cm대의 키 때문에 주전이 아닌 벤치 신세는 물론 농구 그만두란 소리도 듣고 스스로도 농구를 포기하려고도 했다가, 다른 건 몰라도 슛 하나만 잘 하면 농구 잘할 수 있다는 생각에 하루에 천 개의 슛을 던지며 그야말로 미친 듯이 연습을 거듭했고, 송도고 진학 후 [[전규삼]] 감독에게 혹독할 정도로 긴 시간동안 기본기의 지도를 받으며 고3의 나이에 슛에 대한 도를 깨달았다. 거기다 작던 키까지 크기 시작했고, 그 덕에 졸업할 무렵에는 시절에는 모든 대학이 탐내는 슈터가 되어 있었다. 1977년에 고려대학교 경영학과로 진학하여 농구부에 들어가 대학 팀이고 실업 팀이고 가리지 않고 이겨나가며 '안암골 호랑이의 신화'를 만들었다. ||[[파일:external/img.yonhapnews.co.kr/2060926s4559609_P2.jpg|width=100%]]|| 그뒤 말 그대로 전쟁같은 스카우트 파동 속에 현대전자 농구단에 입단[* 이 때 현대전자 농구부 스카우트 담당이었던 [[김용휘]]가 온갖 고생을 했다고 한다. 원래 삼성에 가기로 했지만 김용휘와 같은 [[아파트]]에 살던 이충희의 동기 [[임정명]]을 이용해(현대에 입단하기로 약속했지만 이충희를 뺏긴 삼성이 임정명을 데려갔다.) 꼬드기는데 성공했다고...][* 당시 대학농구를 보러왔던 [[정주영|왕회장]]이 이충희의 현란한 플레이에 반해서 '''"무조건 잡으라"'''고 지시했다는 카더라가 있다. 왕회장의 말이 곧 법이던 당시 [[현대그룹]] 분위기를 생각한다면...(…) 참고로 정주영 회장은 실제 농구 매니아로 [[잠실실내체육관|잠실체육관]]에서 대학농구나 [[농구대잔치]]를 직접 관람하는 모습이 자주 방송에 잡혔다.], 이충희는 대한민국 농구를 상징하는 스타로 활약했고 금융권 팀을 제외, 실업팀이라곤 현대와 삼성밖에 없던 시절 삼성 [[김현준(농구)|김현준]]과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며 큰 인기를 끌게 된다. 박수교, 신선우, 이원우 등 국가대표 센터와 가드진을 보유했던 현대팀에서 이충희는 우승을 하기도 하고 삼성 신동찬의 수비에 묶여 삼성에게 패배를 당하며 우승을 내주기도 했었다. || [[파일:external/img.tf.co.kr/130508_5189b5e8a699c.jpg|width=100%]] || || 이충희와 허재 || || [[파일:external/image.sportsseoul.com/l_2015010601000287300017421.jpg|width=100%]] || || 영광의 현역 시절 [[신동파]]와 함께. || 1980년대 후반 [[대만]]과의 경기에서 무릎 부상을 당하고 퇴행성 관절염까지 앓으면서 제대로 선수 생활을 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 무릎 부상이 거짓이라는 의혹이 있다. 후술 참고] 더불어 팀의 포인트 가드 [[박수교]]가 은퇴를 하고 수비수에 묶여 고전하며 이충희의 득점력도 떨어져갔다. 그렇게 새로운 시대의 강자 [[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기아자동차]]에게 왕좌를 내주며 화려했던 선수 생활에 비해 초라하게 은퇴를 하였다.[* 후배들은 그런 이충희를 보며 자신들은 이충희처럼 초라한 은퇴를 하고 싶지 않다고도 했었다.] 농구대잔치 기록은 || '''연도''' || '''출장 경기 수''' || '''총 득점''' || '''평균 득점''' || || 1983년 || 26경기 || 642득점 || 24.6득점 || || 1984년 || 21경기 || 687득점 || 32.71득점 || || 1985년 || 13경기 || 434득점 || 33.38득점 || || 1986년 || 23경기 || 695득점 || 30.21득점 || || 1987년 || 14경기 || 473득점 || 33.78득점 || || 1988년 || 21경기 || 629득점 || 29.95득점 || || 1989년 || 14경기 || 439득점 || 31.35득점 || || 1990년 || 19경기 || 339득점 || 17.84득점 || || 1991년 || 14경기 || 74득점 || 5.28 득점 || 농구대잔치에 [[3점 슛]] 제도가 도입된 건 [[1985년]] 부터로, 그 이전의 기록은 3점 슛 없이 만든 기록이다.[* 이충희는 3점 슛을 많이 쏘던 선수가 아니었다.] 이게 가능한 것이 이 시절의 현대는 포워드에게 골을 몰아주는 분업 농구를 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 때문에 상대팀에서는 이충희와 이원우 쌍포만 수비로 묶으면 이길 수 있었다.] 포인트 가드 박수교와 기본적인 포메이션을 갖춘 상태에서 이충희가 안심하고 슛을 쏠 수 있도록 박수교가 원활한 볼배급을 해주었기 때문에 슛이 가능했다. [[무릎]] 부상으로 선수생활을 그만두었음에도 대만 홍궈팀에선 벤치에만 앉아 있어도 된다며 파격적인 대우로 이충희에게 영입의사를 표했고, 이충희는 하도 대우가 좋아서 일단 응했는데, [[대만]]에 간 이후 이충희의 무릎은 거짓말처럼 상태가 좋아졌다. 결국 하위권이던 팀을 상위권으로 이끌고 선수 겸 감독까지 하며 팀을 우승시키기에 이르렀다. 이충희가 [[대만]] 시절에 얻은 별명은 '''神射手'''. '''사실 이충희의 무릎 부상에 대해선 말이 많은데''' 당시 현대에서 이충희를 은퇴시키기 위해 거짓으로 무릎 부상 핑계를 댔다는 의혹이 있고, 기아자동차에 털리던 이충희가 자신의 시대가 저무는 것에 은퇴를 하고 대만으로 건너갔다는 얘기도 있다. 여하튼 그렇게 대만에서 활동하다 국내 프로 농구팀 창원 LG 세이커스의 창단 감독 영입 의사를 받아들여 한국에서 감독 생활을 시작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