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탈리아/역사 (문단 편집) === [[이탈리아 통일|통일]]과 [[이탈리아 왕국]] === 나중에는 북부 이탈리아는 대부분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았고 남부 이탈리아도 모두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결국 [[사르데냐 왕국|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과 [[교황령]]을 제외한 이탈리아는 모두 [[오스트리아 제국]] [[합스부르크 가문]][*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은 오스트리아 제국 직할령이었고, [[토스카나 대공국]]과 [[모데나 레조 공국]]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방계가 통치했다.]과 [[스페인]] [[보르본 왕조|부르봉 가문]][* [[양시칠리아 왕국]]과 [[파르마 공국]]을 스페인 부르봉 방계가 통치했다.]의 영향 아래에 있던 상태였다. 그래도 이탈리아 반도는 유럽의 다른 지역과 다른 동질성을 가지고 있었다. 분열된 이탈리아를 합쳐야 한다는 여론이 커졌고,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주도로 대부분의 국가들이 합쳐져서 [[이탈리아 통일|통일]]을 이루었다. [[주세페 가리발디]][* 애초에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 니차 출신이었다. 니차는 오늘날 [[프랑스]]의 [[니스]].]가 활약한 시기가 이 시기였다. 당시 오스트리아의 개입을 막기 위해 [[프랑스 제2제국|프랑스]] [[나폴레옹 3세]]와 연합해서 [[롬바르디아]]에서 오스트리아를 몰아냈는데, 이탈리아가 통일되지 않도록 견제하기 위해서 나폴레옹 3세가 [[프랑스군]]을 후퇴시키고 오스트리아와 종전해서 더 진군하지 못했고 이 사건으로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재상이었던 [[카밀로 카보우르]]는 사임을 선언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카보우르는 다시 재상에 임명되었다.] 프랑스와 다시 동맹하기 위해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은 1860년 토리노 조약을 체결하여 [[토스카나]]와 [[에밀리아로마냐]]를 합병하는 조건으로 [[사부아|사보이아]][* [[사보이아 가문|사보이아 왕조]]의 본관을 양도할 정도로 통일에 대한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열망이 컸다.], 니차(Nizza 현 프랑스 [[니스]])를 프랑스에 넘겨주었다. 1861년 3월 17일, [[이탈리아 왕국]]이 선포되어 사르데냐-피에몬테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가 초대 이탈리아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이후에는 이탈리아계가 다수 거주하는 [[베네토]], [[티롤]], [[이스트리아 반도]], [[달마티아]] 지역을 점령하기 위해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프로이센 왕국]]과 동맹을 맺었다. 동맹 직후에 일어난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 참여하여 [[베네토]] 지역을 획득했으며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때문에 프랑스가 철수한 상황에서 교황령을 합병하여 이탈리아 통일은 일단락되었다. 원래부터 이탈리아는 인구가 많은 지역이었지만 인구 증가가 느려지기도 했고 서로 합쳐져 있지도 않아서 영향력이 많지 않았는데 이탈리아가 통일을 끝낸 1870년 이탈리아의 인구는 27,900,000명으로 이미 주변의 강대국 수준의 인구를 확보해서 영향력이 커졌다. 그러나 통일만 되었지 [[이탈리아인]]으로서의 정체성은 아직 형성되지 못한 상황이었고, 신생 이탈리아 왕국의 주요 기득권 세력이었던 기존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 출신 관료들은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행정과 법 제도를 남부를 위시한 다른 지역에 적용하려 시도했다. 이때문에 남부에서는 거의 내전에 가까운 유혈 사태가 벌어졌으며, [[움베르토 1세]] 치세 내내 이탈리아 왕국 사회는 불안으로 얼룩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