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태규 (문단 편집) === 성장 및 교육 === 1902년 [[예산군]]에서 한학자이자 중농인 이용균의 아들로 출생했으며 본관은 [[전주 이씨|전주]]다. 아버지 이용균은 개화한 양반으로 근대교육에 우호적인 태도를 지녀 이태규는 예산의 사립학교에서 청강생으로 다닐 수 있었다. 3년 만에 보통학교를 수석으로 마치고 도지사의 추천을 받아 1915년 [[경기고등학교|경성고등보통학교]][* 이때 화학 수업 및 여러 화학 관련 도서를 읽으면서 화학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에 무시험으로 입학하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도시로 나가 신식 교육을 접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일제가 만들어 놓은 철도노선이 큰 도움이 되었다.][* 그가 과학자가 되는 꿈을 굳힌 계기 또한 일본인 화학교사 호리堀正南와 박물학 교사 모리森島三의 영향이 컸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태규는 만세를 부르고 고향에 내려갔으나 학교에 부름을 받고 돌아와 만세를 부르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하여 [[경기고등학교|경성고등보통학교]]졸업 할 수 있었다. [[경기고등학교|경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추가로 동 학교의 1년의 사범과 과정을 수료한 후 조선총독부 관비유학생 신분으로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로 유학[* 경성고보 때 거의 매 학기 수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입학할 때는 영어 알파벳조차 다 알지 못했다고 하니 식민지 조선의 공교육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하여 1924년 차석으로 졸업하였다.[* 영어와 수학의 기초가 부족하여 처음에는 난관이 있었지만, 그의 밤샘 노력 끝에 차석으로 졸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인이란 이유만으로 졸업 후에도 기대하던 교사 발령이 나지 않자 진로를 바꿔 [[교토대학|교토제국대학]]에 입학, 1927년 졸업한다. 이후 물리화학자인 호리바 신키치(堀場信吉)[* 호리바는 다정다감한 인격자로 이태규를 식민지 조선인이지만 차별대우하지 않고 각별히 아꼈다.] 교수 밑에서 1931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당시 신문지상에는 한국인 최초의 이학박사라고 보도되었으나 이는 오보로, 1926년 미시간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이원철]] 박사가 한국인 최초의 이학박사이다. 다만 최초의 화학 분야 박사이기는 하다.][* 화학 분야 두 번째 한국인 박사가 나오기까지는 10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참고로 의학에서는 1924년 [[윤치형]] 박사가, 공학에서는 1934년 [[최황]] 박사가, 농학에서는 1936년 [[우장춘]] 박사가 최초로 받았다. 분야를 불문하고 최초의 여성 박사는 1929년 공중보건학으로 학위를 받은 [[송복신]] 박사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