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태규 (문단 편집) === 경력 === 박사학위를 취득했음에도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하다가 [[1937년]]에 가서 [[교토제국대학]] 조교수로 임명되었다.[* 조선인 이태규의 조교수 발령은 교수회의의 엄격한 심사를 거쳐야 했으며 일제 문부성의 승인 또한 받아야 했다. 그러나 그의 지도교수였던 호리바의 고집덕분에 조교수로 임명될 수 있었다.] 그 후 정용순, [[김연수(기업인)|김연수]] 등 같은 조선인 자산가들의 도움으로 재외연구생 제도를 통해 [[1939년]]부터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연구하였다. 처음 반 년은 촉매 분야의 권위자인 테일러(H. S. Taylor)와 연구하다가 프린스턴에서 열린 액체이론 심포지움을 듣고 이론화학으로 연구 분야를 바꾸기로 마음먹는다. 아이링(H. Eyring) 교수 연구실로 옮겨 이론화학, 특히 계산양자화학을 연구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41년]]에 [[미일관계]]가 악화되면서 당해 7월 일본으로 돌아간다.[* 박사가 돌아간 후 다음 배편으로 [[외교공관 철수|일본 대사관 직원과 그 가족들이 철수하였고,]] 12월에는 잘 알다시피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다.] 예정보다 일찍 돌아온 상황에서 교토제국대학에 형식적으로만 재직 상태일 뿐, 채용해주는 곳이 없어 애매한 상황[* [[경성제국대학]]에서 화학과 교수로 이 박사를 초청하였으나 교토제국대학에 형식상 재직 상태였기 때문에 응할 수 없었다.]이었던 이 박사는 다시금 김연수에게서 연간 연구비 3,500원을 지원받아 연구를 지속하였고, [[1943년]]에는 교토제국대학에서 정식으로 교수로 임용되었다. 그러나 [[1945년|머지 않아]] 일본이 패망하자 당해 11월 스스로 귀국해 [[경성대학]] 이공학부장으로 취임하였으며, 이듬해 [[서울대학교]] 설치와 함께 문리과대학장에 임명되었다. 한편, [[1946년]]에는 현재는 대한화학회로 개칭한 조선화학회를 창립하고 초대 회장으로 선출된다. 그러나 광복 직후 이념 대결로 인해서 수업이나 업무가 거의 불가능한 지경이었고, 교토제국대학에서 학위를 수여받고 조교수로 재직한 경력을 빌미삼은 좌익계열 학생들에게 친일파로 낙인찍혀 숱한 테러를 감내해야 했다. 이에 결국 [[1948년]] 아이링 박사가 대학원장으로 재직하던 유타 대학에서 액체의 구조와 동역학에 관한 연구를 수행하였다.[* 곧 귀국할 계획이었으나 [[한국전쟁]]으로 인해 연기되었다.] 특히 [[1955년]]에는 리-아이링 이론은 비-뉴턴 유체[* 점성이 전단율, 그러니까 액체의 두 층이 서로 밀리는 변형이 생기는 속도에 의존하는 액체. 반대로 뉴턴 유체에서는 전단력이 전단율과 선형으로 비례하며 이 비례 상수가 액체의 점성이 된다.]의 전단률에 관한 리-아이링 이론을 발표하였다. 이후에도 유변학, 액체이론 및 화학동역학 분야의 연구를 계속하였다. 한국에서 교수 정년이 60세로 규정되어 고국으로 돌아갈 교수직이 없어지자 그는 유타 대학에 정착하기로 생각하고 [[1962년]]부터 유타대학에 정식으로 교수로 재직하였다.[* 유타대학 교수 정년은 당시 만 68세.] 유타대학 교수직에서 은퇴한 이후 [[1973년]] 귀국해 [[1992년]]에 9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한국과학기술원 교수로 재직하며 [[응집물질물리학]] 및 [[통계역학]]을 연구하였다. 또다른 한국 출신 화학자인 전무식 박사(1932-2004, 한국에서는 [[육각수]]의 개발자로 유명한데 실제 주요 연구분야도 물에 대한 양자화학적 계산이었다)와는 매우 깊은 인연이 있다. 유타대학에서 사제관계를 맺었으며 이후에 카이스트 교수로도 함께하였다. 전무식 외에도 이태규에게 유타에서 지도받은 한국인 화학자들이 다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