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태현(씨름) (문단 편집) === 씨름 선수 경력(~2006년) === 의성고등학교를 거쳐 1993년 9월 계약금 3억원에 청구건설 씨름단과 입단 계약을 체결하고 1994년 민속 씨름에 데뷔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7관왕의 위업을 달성하는 등 고교 시절 그 연령대의 지존으로 통했으며, 민속씨름에 첫 선을 보인 1994년부터 두각을 나타내더니 9월에 열린 제32회 천하장사 대회에서 절친이자 라이벌인 [[백승일]][* 2004년 LG투자증권 씨름단 해체 사태 후 순천시청에서 잠시 뛰다가 2005년 2월 설날 대회를 끝으로 은퇴했다. 은퇴 후 [[트로트]] 가수로 전향했다.]을 꺾고 처음으로 천하장사에 올랐다. 하지만 이태현이 천하장사로 결정된 과정은 상당한 논란이 되었다. 5판 3선승제로 치러지는 결승전에서 12판(1시간 25분)의 지루한 승부가 펼쳐진 끝에, 계체를 통해 체중이 더 적게 나가는 이태현이 천하장사로 결정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1~3번째 판을 전부 비긴 뒤 4번째 판은 백승일이 이기고 5번째 판에서는 이태현이 승리하여 1:1이 되자, 서로를 너무나 잘 알고 있던 두 선수가 공격을 들어가면 되치기로 당한다는 생각에 섣불리 기술을 못 걸고 눈치만 보는 상황이 이어지면서 관중들로부터 욕설과 야유가 쏟아졌다.[* 당시 경기를 다시 보면 진짜 아무것도 안하고 두 선수가 2분 가까이 가만히만 있는게 전부였다. 관중과 시청자는 물론이고 아나운서와 이만기 해설마저 답답해 했으며 심지어 부심은 그 광경을 보고 욕을 하기도 했다.] 다섯 판 내리 승부가 나지 않자 10번째 판이 끝난 후 연맹에서는 긴급 이사회를 소집했고, 12번째 판까지 승패를 가리지 못할 경우 두 선수의 체중을 측정하여 더 가벼운 쪽을 승자로 한다는 황당한 규칙을 신설하였다. 12번째 판이 무승부로 끝나면서 계체를 실시하게 되었는데, 당시 백승일을 의식해 의도적으로 몸무게를 좀 더 가볍게 유지하던 이태현이 결국 계체승[* 계체 결과 이태현은 132.95kg, 백승일은 135.85kg로 측정되었다.]을 거두었다. 이후 한동안 이태현에게는 저울장사라는 오명이 따라붙었고, 백승일은 의욕을 잃고 하락세를 타기 시작했다. 1994년 10월에 생애 첫 백두장사에 등극한 이태현은 이듬해인 1995년 지역장사[* 1년에 3번 있었던 천하장사 대회가 1995년부터 1년에 1번으로 줄어들고, 그 대신 지역장사 대회가 신설되어 1년에 5~6회 열렸다. 지역장사 대회는 2002년을 끝으로 폐지됐으며, 8년 간 총 43차례 개최됐다.] 5개 대회 중 4개를 석권하고 백두장사도 4차례나 차지하는 등 절정의 기량을 뽐냈다. 10월 원주대회까지 1995년 한 해 동안의 승률은 무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5111600209126001&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5-11-16&officeId=00020&pageNo=26&printNo=23027&publishType=00010|90.8%]](65전 59승 6패)였고, 역대 최다인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5101200289119007&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5-10-12&officeId=00028&pageNo=19&printNo=2365&publishType=00010|30연승]][* 설날장사(2월) 2승 + 부산대회(4월) 13승 + 여수대회(5월) 10승 + 청주대회(6월) 5승]의 기록을 수립했다. 하지만 11월 천하장사 대회를 앞두고 [[https://sports.news.naver.com/news.nhn?oid=001&aid=0004000975|오른쪽 무릎 부상]]이 심각해져 제 기량을 발휘하기 힘들었고, 한 해를 지배하고도 정작 가장 중요한 천하장사 대회에서는 8강에서 탈락의 고배를 마시고 말았다. 1996년과 1997년에는 '들소' [[김경수(씨름)|김경수]], '봉팔이' [[신봉민]]과 트로이카 체제를 구축하여 라이벌리를 이루었는데, 셋 중 우승 횟수 및 승률이 가장 좋은데다 훤칠한 외모까지 곁들여진 이태현은 '모래판의 황태자'라는 칭호을 얻으며 최고의 스타로 우뚝섰다. 그러나 1996년에는 천하장사 대회 결승전에서 김경수에 1:3으로 지면서 준우승에 그쳤고, 1997년에는 8강에서 신봉민에게 덜미를 잡히면서 천하장사에는 오르지 못했다. 1998년부터는 무지막지한 밀어치기를 앞세워 급부상한 '골리앗' [[김영현(씨름)|김영현]]이 치고 올라왔고, 2년 간 이태현과 김영현의 강력한 양강 구도가 형성되어 사실상 둘이 씨름판을 양분하다시피 했다. 1998년과 1999년 천하장사 대회에서는 2차례 모두 김영현과 결승전에서 맞닥뜨렸는데, 2년 연속 승자는 김영현이었고 이태현은 2인자에 머물러야 했다. 각종 대회에서 수차례 황소트로피를 들어 올리고도 유독 천하장사와는 인연이 닿지 않았던 이태현의 생애 2번째 천하장사 타이틀 획득은 2000년이 되어서야 이뤄졌다. 5월 하동 대회에서 당한 무릎 부상으로 5개월간 시합에 나서지 못하는 등 시즌 내내 컨디션이 좋지는 못하였으나, 천하장사 대회 4강에서 김영현을 2:0으로 물리친데 이어 결승전에서는 천적인 김경수[* 유일하게 상대 전적에서 밀리는 선수로, 2006년 설날 대회까지 [[https://sports.news.naver.com/news.nhn?oid=001&aid=0001207212|27승 30패]]로 열세였다.]를 3:0으로 완파하며 천하장사 등극에 성공했다. 2001년 5차례나 준우승에 머물며 무관에 그쳤던 이태현은 절치부심한 2002년을 다시 한 번 자신의 해로 만들었다. 3월 용인 대회에서 백두장사와 지역장사를 독식함으로써 부활을 선언했고, 이후 민속씨름 사상 최초로 400승 고지를 밟는 등 최고 승률로 승승장구한 끝에 자신의 통산 3번째 천하장사에 오르는 기염을 토한 것이다. 2003년에도 3차례 백두장사를 차지하며 전년도의 기세를 이어갔으나, 천하장사 대회 4강에서 김영현에게 패해 2연패 달성에는 실패했다. 2004년에는 7월 훈련 도중 십자인대가 파열되는 중상을 입어 연말에 열리는 천하장사 대회에 참가하지 못했다. 이후 2005년과 2006년에 백두장사를 각각 1회씩 더 추가해 이만기와 타이(통산 18회)를 이룬 이태현은 2006년 7월 은퇴를 선언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