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팔문 (문단 편집) == 생애 == 1886년 전라도 무주도호부 풍동면 마곡리(現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금평리 마곡마을)에서 아버지 이시옥(李時玉, 1841. 3. 15. ~ 1882. 7. 14.)[* 자는 탁여(琢汝).]과 어머니 [[연안 이씨]](1849. 8. 1. ~ 1925. 12. 13.) 사이에서 두 아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무주군 풍동면 금척리(現 무주군 무풍면 금평리 금척마을)[*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2118&evntId=0034986801&evntdowngbn=Y&indpnId=0000018168&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1908년 8월 7일 1심 판결문]]에는 당시 풍동면 쇠현(釗峴)에 거주한다고 기재돼 있는데, 금척마을의 다른 이름이 쇠재마을이고 쇠재가 곧 쇠현이다.]으로 이주했다. 일찍이 [[대한제국군]]에서 3년간 복무한 바 있으며, 1907년 [[대한제국 군대 해산]]이 단행되자 그해 11월 전라북도 무주군 풍동면 소숙방산(少宿方山)에서 [[이장춘]]이 이끄는 수십 명의 의병을 만났고, 그들의 권유에 따라 의병진에 입대했다. 12월 잠시 귀향했다가 1908년 3월 다시 의병진에 복귀해 그해 4월까지 한 달간 무주군 일대에서 무장한 채로 의병활동에 필요한 땔감을 채취하고 군수품을 운반했으며, 훈련장(訓練將)으로서 직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일본 제국 육군]]에 활동상이 발각되어 체포되었고, 1908년 8월 7일 대구지방재판소에서 형법대전 제195조에 의거, [[내란죄|내란]] 혐의로 유기 유배형 3년을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2118&evntId=0034986801&evntdowngbn=Y&indpnId=0000018168&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선고받아]]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후 1910년 [[경술국치]] 직후 공포된 [[메이지 시대|메이지]] 43년(1910) 칙령 제325호 대사령에 의해 [[특별사면]]을 받아 출옥했다. 출옥 후의 행적 및 사망년월일, 사망지 등에 대해서는 자료가 미비해 알 수 없다. 202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조선 의병장]][[분류:무주군 출신 인물]][[분류:원주 이씨]][[분류:1886년 출생]][[분류:몰년 미상]][[분류:건국훈장 애족장]]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