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해봉 (문단 편집) == 정치 활동 == 1993년 [[문민정부]] 출범과 함께 공직을 떠난 후[* 본인은 [[김영삼]] 정권이 TK 인사인 자신에게 보복성 인사 조치를 했다고 회고록에서 주장했다.]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대구광역시장]]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문희갑]] 후보에 밀려 3위로 낙선하였다. 이 과정에서 아내 이선희 씨는 연단에서 남편의 지지를 호소했다가 선거법 위반으로 판사 자리를 떠나 변호사로 개업해야 했다.[* 본인은 [[김영삼]] 정권의 TK에 대한 박해, 홀대라고 회고록에서 주장했다.][* 다만 현재는 선거법이 개정되어서 공직자라도 직계존속, 배우자의 선거 운동이 가능하다. [[나경원]] 전 의원의 남편인 김재호 판사가 선거 유세를 같이 다닐 수 있는 것이 이 때문.]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대구광역시 [[달서구 을]] 지역구에 출마하여 현역 [[국회의원]]이던 [[자유민주연합]] [[최재욱]][* 원래 [[민정계]]였고 [[신한국당]] 소속이었지만 당시 [[달서구 을]]에 속한 [[상인동]]에서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폭발 사고]]가 일어난데다 TK 홀대론 등으로 인해 TK 전역에서 [[문민정부]]와 [[신한국당]]에 대한 이미지가 좋지 않았다 보니 총선 직전 탈당하고 [[자유민주연합]]에 입당했다. 실제로 같은 선거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출마한 이철우 후보 역시 집권여당 소속임에도 겨우 15%도 안되는 득표율에 그쳤고 당시 대구 내 의석 13석 중 11석을 [[자유민주연합]]과 [[무소속]]이 가져갔을 정도로 대구 지역에서 신한국당의 지지율은 무척 낮았다.]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1997년 말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회창]]을 지지하며 [[한나라당]]에 입당하였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한나라당 대구시당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부터 2006년까지 대한민국 국회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장을 역임하였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친박]]계라는 이유로 한나라당 공천에서 탈락했다. 이에 불복하여 탈당 후 무소속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한나라당]] [[권용범]]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인근 달서갑, 달서병 선거구와는 달리 [[미래희망연대|친박연대]]가 아닌 [[친박 무소속 연대]]를 구성해 출마하였다. 선거 구호는 '''박근혜 - 살아서 돌아오라!!!'''[* 당시 선거 벽보를 확인할 수 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img_pg.aspx?CNTN_CD=IE000887852&tag=%EC%9D%B4%ED%95%B4%EB%B4%89&gb=tag|#]]] 당선 후 한나라당에 복당하였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불출마를 선언하였다. 박근혜의 대권 도전을 위한 친박 중진의 용퇴라고 평가받았지만... 같은 해 8월 19일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아무래도 본인의 건강 상태를 잘 알고 있었기에 불출마를 결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달성군]] [[옥포읍]]에 있는 그의 묘소엔 매년 기일을 전후해 지역구 후임인 [[윤재옥]] 의원이 방문하여 참배하고 있다. 지역구 관리를 꽤 잘 한 편이라고 평가받는데, [[달서구]] 내 무게축이 [[성서(대구)|성서]]에서 달서구 을 지역구가 속한 [[월배]]로 옮겨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때마침 [[성서(대구)|성서]]의 아파트들이 노후화되고 있기도 했다.] [[월배신도시]](신월성) 개발[* 그가 초선의원 시절 [[월배공업단지|월배공단]]을 주거용지로 전환한 것이 개발의 시작이었다.], [[테크노폴리스로|테크노폴리스 진입도로]] 건설, 정부대구지방합동청사 [[달서구]] 대곡동 유치 등 지역구 관리를 탄탄하게 하여 [[제18대 국회의원 선거|18대 총선]] 당시 공천을 받지 못해 무소속으로 출마했음에도 불구하고 57%의 득표율로 [[한나라당]] [[권용범]] 후보를 17.47%P 차이로 꺾고 승리했다.[* 옆 [[달서구 갑]]에서 현역 3선 [[박종근(1937)|박종근]]이 [[홍지만]]을 7.31%P밖에 차이를 벌리지 못하고 승리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처럼 이해봉이 지역구 관리를 잘 해둔데다가 후임인 [[윤재옥]] 역시 나름 지역구 관리에 신경쓰고 있어 젊은 인구가 계속 유입되는 신시가지임에도 [[달서구 을]]은 [[북구 을(대구)|북구 을]]이나 [[수성구 갑]]과 달리 보수정당에 압도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