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해창(1953) (문단 편집) == 여담 == * 이해창이 '''쌕쌕이'''란 별명으로 불릴 만큼 엄청난 주력에 관한 일화가 있다. 1983년 9월 14일, [[잠실야구장]] 에서 열린 [[삼성 라이온즈]]와의 시즌 마지막 홈 경기에서 2대 3으로 뒤진 8회말 1사 후에 [[김재박]]이 [[권영호(야구선수)|권영호]]에게 내야안타를 뽑으며 출루했고, [[이광은]]은 2루수 플라이에 그치며 투아웃이 되었지만 이해창이 좌익수 키를 넘기는 2루타를 터뜨렸다. 좌익수 [[정현발]]의 송구가 유격수 [[오대석]]의 글러브에 들어간 시점에서 3루를 돌아 불과 두세걸음 정도 떨어져 있던 김재박은 '''속도를 줄이지 않고 그대로 홈에 뛰어들었다'''. 누가 봐도 [[자폭]]이 분명한 무모하기 그지 없는 주루 플레이였는데 깜짝 놀란 오대석이 포수 [[이만수]]에게 송구한다는 게 그만 김재박의 헬멧을 맞고 백스톱 쪽으로 빠지면서 김재박은 행운의 득점을 올리며 3대 3 동점을 만들었다. 사실 이것은 행운이었다기 보다는 김재박이 이만수의 미트 위치를 보고 주루 방향을 잡아서 송구를 지능적으로 방해한 고단수의 주루 플레이라고 할 수 있었다. 여기서 끝난 게 아니라 공이 뒤로 빠진 사이에 2루를 거쳐 3루까지 진루한 '''이해창도 망설임 없이 홈을 향하여 질주하였고''', 백스톱으로 달려간 이만수가 홈 커버를 들어온 1루수 [[함학수]]에게 황급히 공을 던졌지만 이해창은 태그를 피하며 홈 베이스를 터치하면서 결승 득점을 올렸다. 이날 경기는 MBC의 4대 3 승리로 끝났고 그 해 MBC가 후기리그 우승을 차지하는 중요한 분수령이 되었다. 당시 3루 코치로 나가 있던 [[김동엽(1938)|김동엽]] 감독은 경기 후 인터뷰에서 '''"김재박이 홈에서 살았길래 '아 이제 3대 3 동점에 (4번타자)[[이종도]]가 나오니까 해볼만 하겠다' 생각하는데 누가 눈앞을 쌩 하고 지나가더라고. 이해창이야. 깜짝 놀라서 [[고만해, 미친놈들아!|아이고 저 미친 놈! 스톱 스톱!!]] 했는데 벌써 홈에 들어갔더라고. 사람이 그렇게 빠른 줄 진짜 몰랐지"''' 라며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 1986년 시즌 후 [[삼성 라이온즈|삼성]]과 이해창의 연봉 협상이 결렬되고 위에 언급한 대로 KBO에 제기한 연봉조정 신청이 이해창의 승리로 끝날 가능성이 높아지자 삼성은 부랴부랴 이해창의 트레이드를 추진하였고, 이해창에게도 "현금 3천만원 선에서 (이해창을) 데려갈 구단이 있는지 한번 찾아보라" 며 권유하기도 했다. 즉 선수 자신이 트레이드 될 팀을 스스로 물색해 보라고 할 정도로 이해창의 트레이드는 기정 사실이었던 셈이다. 이 때 뒷이야기로 이해창은 당초 [[선린인터넷고등학교 야구부|선린상고]] 선배인 [[배성서]]가 감독으로 있던 [[빙그레 이글스]]로 이적을 원했고 배성서 감독도 신생팀으로서 한 명이라도 전력보강이 절실했던 지라 이해창 영입에 적극적으로 나섰으며, 당시 빙그레 단장이던 노진호와 삼성의 윤경헌 단장 또한 [[중앙일보]] 체육부 기자 시절 한솥밥을 먹은 인연까지 묶어 이해창의 빙그레 행을 추진했지만, 삼성은 이해창+[[정진호(1956)|정진호]]를 묶어서 보내려고 했던 반면 빙그레는 부상으로 실력이 저하된 정진호 대신 [[김동재]]나 [[오대석]]을 달라고 하는 바람에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청보 핀토스]] 박정삼 단장[* 그는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일보]] 기자로 재직하면서 [[대한민국 제5공화국|5공]] 초기 언론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다가 해직당한 후 [[청보 핀토스]], [[태평양 돌핀스]] 단장을 역임했다. 이후 언론계로 돌아와 [[국민일보]] 부사장, 굿데이 대표이사를 거쳐 [[참여정부]] 시절 초기에 무려 [[국가정보원]] 국내정보 담당 2차장으로 재직한 바 있다. 현재는 [[한국관광공사]] 산하 외국인 전용 [[카지노]]의 대표로 일하고 있다.]은 [[한국일보]] 수습기자 선배였던 윤경헌 단장에게 전화를 걸어 "저번에 [[김기태(재일교포)|김기태]]를 데려갈 때 내야수 좀 달라고 했는데 힘들다고 하더니,[* 당시 청보는 김기태를 삼성에 내주고 반대급부로 내야수 [[김근석]]과 외야수 [[정현발]]을 영입했는데, 내야수가 더 필요하다는 청보의 요청에 삼성은 '''"[[강기웅]]과 [[류중일]]을 둘 다 잡지 못하는 한 우리도 내야수 사정이 빡빡하다"''' 라며 양해를 구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근데 삼성은 그게 실제로 이루어졌네???]](...)~~] 빙그레와는 정진호가 어쩌구 김동재가 저쩌구 하느냐" 라고 섭섭함을 토로하자 머쓱해진 윤 단장은 박 단장에게 "미안하게 됐다. '''그럼 이해창이라도 데려 가겠는가?'''" 라고 제의했고[* 마침 빙그레가 이해창에 대한 영입 의사를 철회한 시점이라 가능한 얘기였다.] '''으아니 이게 웬 떡이냐''' 싶던 박 단장은 즉시 김정우 구단주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고 [[제주도]]에서 훈련 중이던 [[강태정]] 감독과도 신속한 협의를 거쳐 OK 사인을 받아내어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이 이해창을 현금 트레이드로 데려오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후일 박정삼 단장은 인터뷰 때 "중간에 끼어들어 이해창을 채간 격이라 빙그레에게 미안한 감도 있었지만 아무튼 이해창이란 [[베테랑]]을 영입하여 적어도 우리 팀 전력이 15%는 상승했다고 본다" 라며 털어놓기도 했다.] * 아들인 이준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야구를 했다.[* 사고쳐서 낳은 아들맞다.] [[선린인터넷고등학교 야구부|선린상고]] 졸업 후 삼성에 지명되었으나 [[건국대]] 진학을 선택했고, 대학 졸업 후에는 LG에 지명되었으나 미국 진출을 한다고 LG 입단을 거부하고 상무에 입대했다. 전역 후 미국 진출은 커녕 2003년 --아빠가 뛰면서 [[1985년 삼성 라이온즈 통합우승|우승반지 득템했던]]-- 자신을 처음 지명했던 삼성에 신고선수로 입단했다가 정식 선수가 되어, 10월 2일 [[이승엽]]이 56호 홈런을 기록한 경기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1군 등판을 하여 1.2이닝동안 3피안타 1탈삼진 1자책점을 기록하였으며, 그 해 은퇴했다. 은퇴 뒤에는 방황하다가 [[대만프로야구]]로 진출하였는데 거기서도 털리는 바람에 결국 세미프로인 중국으로 가서 베이징 야구팀에 입단했다는 기사가 있으며, 이후 행적은 불명이다. * 한국 야구계가 알루미늄 배트를 도입하는 계기를 만든 인물이기도 하다.[* 1975년 4월 건국대가 [[하와이]] 원정을 갔을 때 자비로 알루미늄 배트를 사들여와 소개한 바가 있다.] * [[고우영]] 화백과 친분이 있어서 현역시절 그를 모델로 한 전기 [[만화]]를 1983년 [[새소년]]에 연재하기도 했다. 연재 당시 제목은 '''백기사의 아들''', 단행본으로는 '''달려라 야구왕'''이란 제목으로 1986년에 우석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 그가 도루왕을 차지한 해에 동명이인의, [[이해창(1987)|아들뻘 후배 선수]]가 태어났다. 1987년생 이해창은 현재 [[한화 이글스]]의 포수로 높은 도루 저지율을 자랑하고 있어 재미있는 대조점을 보여주고 있다. * [[이회창|모 정치인]]과 이름이 흡사한 관계로, [[마구마구]]에서 삼성 or 청룡덱 VS (빙그레) 이글스덱이 맞붙을 경우, 이글스 측 게이머가 빙그레 [[김대중(야구선수)|김대중]]을 투수로 등판시켰을 때 위엄차게 [[대타]]로 등장하기도 한다. ~~본격 [[제15대 대통령 선거|영혼의 맞다이]]~~ ~~[[이해찬|이 정치인]]하고도 많이 비슷한데?~~ * 마구마구 모바일에는 윤보현이라는 가명으로 들어가있다. 청보덱에서 그나마 쓸만한 유격수 테이블세터..였는데 [[2016년]] 중순쯤에 갑자기 엘리트카드로 승격되었다. * 위에 언급한 대로 [[홍성흔]]이 도봉리틀야구단에서 뛸 때 잠깐 그를 지도한 연이 있다. 정확히는 리틀야구단 선수들을 상대로 하루 동안 재능기부를 했던 것인데 그 팀에 홍성흔이 있었던 것. 그 어리고 암울했던 시절[* 당시 홍성흔은 부모님의 이혼과 아버지의 지방 근무로 인한 양친의 부재, 그리고 가난 때문에 정신적으로 큰 고통을 받고 있었다. 이해창도 어려운 유년기를 보냈으니 동병상련을 느낀 듯 하다.]에도 야구에 열정적으로 임하던 홍성흔을 눈여겨봤다고 하며, "꼬마선수도 선수고 나도 선수였으니 선수끼리 보고싶었다"며 자신을 찾아준 홍성흔에 대한 반가움을 드러냈다. * [[이만수]]에 버금가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이다. 서울 한우리교회에서 이해창 안수집사와 아내인 풍옥희 권사[* 기독교 비영리 단체인 복음의전함 소속이며, 아들 이준의 SNS를 링크건 것을 보면 본인이 맞는듯 하다.]라고 불리는 것을 보면, 상당히 오랜기간 신앙생활을 한 듯하다.--이런 분이 어떻게 속도위반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