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헌(송나라) (문단 편집) === 하주에서의 싸움 === [[왕소(송나라)|왕소]]가 하황(河湟)[* 칭하이성 일대]의 수복을 청하면서[* 1068년 평융책 3편을 올렸는데, 대략적인 내용은 서하를 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 황 두개의 주를 반드시 차지해야 하고, 그래야 서하가 양면에서 협공을 당한다는 내용이다.] 이헌은 왕소와 함께 하주(河州)로 진군하였고 며칠 지나지 않아 북송군은 하주(지금의 간쑤성 린샤)를 점령하고 1,000리 이상의 땅을 개척하고 30만 명 이상의 인구를 모집했으며 심지어 강족 추장 목정의 아내도 포로로 잡는다.[* 이를 하주 전투라고 함] 북송은 이곳에 희하로를 설치하고 왕소를 경략위무사로 임명하였으며, 이헌도 전공으로 동염원사, 어약원 간당관에 봉해진다. 곧 서하의 공격이 있었으나, 우정곡과 가락성의 두 전투에서 송군은 다시 싸워 이긴다. 송 신종은 이헌의 군사 지휘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그로 하여금 희하로를 안무하게 하고 왕소도 포상을 받는다. 바로 그해 2월, 표면적으로 잠잠해졌던 하황 지역의 전쟁이 재발하는데, 하주에서 쫓겨난 서하 추장 목정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하주 지주 경사립은 소식을 듣고 급히 군사를 모아 답백성으로 갔지만, 급히 출병한 데다 적과 적과의 차이가 커서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경사립 부대는 겹겹이 포위된다. 하인들은 복수심에 불타서 벌떼처럼 몰려들었고, 송군의 사상자가 매우 컸고, 하주 지주 경사립도 난군에서 전사한다. 사태가 위급해지자 재상 [[왕안석]] 등은 하황 지역을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왕소는 이에 반대했다. 이때 이헌은 노연로로 달려가 군사 상황을 보고 흥평까지 갔다가 하주 소식을 들은 즉시 멈추고 조정의 명을 기다린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이헌이 희하로로 달려가 왕소와 합류하여 하주의 변화에 대처하라는 송 신종의 명령을 기다린다. 여기서 왕소와 의견 대립이 있었다.[* 왕소는 먼저 목정의 포위망을 무너뜨린 다음 반대로 외부 지원군을 공격하여 하주의 포위를 싸우지 않고 해결할 수 있도록 한 반면 이헌은 상으로 장병들을 격려하고 목정을 죽일 것을 주장한다.][* 결국 왕소는 병사를 이끌고 하주를 우회하여 정강성을 직접 습격하여 불의에 하강을 공격하고 서하 통로를 차단한 후 남산의 요충지로 진입하도록 명한 반면 이헌은 소부대를 이끌고 하주성 밖에서 병력을 이끌고 싸운다.] 일찍이 이헌이 서북을 순시하기 전에 신종은 그에게 황기를 하사했는데, 그 깃발에는 '''명으로써 도적을 파한 자는 배상한다'''는 7개의 큰 글자가 적혀 있었다. 그는 서북 장병들이 왕소에게 마음이 기울고, 자신을 따르는 자들의 투지가 약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출정 전 황기를 들고 군영 입구에 서서 삼군 장병들에게 다음과 같이 호령한다. >이 깃발은 천자가 내린 것입니다. 모든 장병들이 깃발을 바라보며 싸우니 마치 천자가 직접 독전하는 것 같으니 목숨을 걸지 않겠습니까! 장병들의 사기가 높아졌고, 이헌은 또 병사들에게 방산에 지은 모든 막사를 불태우라고 독촉하여 사투를 다짐한 후, 하주 전선으로 가서 목정이 이끄는 부대와 하주성 아래에서 처절한 백병전을 벌였으나 양측 모두 피해가 심했다. 이헌이 또 한 가지 계책을 세워 목정 등의 장막을 불태웠을 때, 강족들은 그제서야 인심이 산만해져, 모두 답백성으로 도망쳤고 그 여세를 몰아 적군을 대파하고 일거에 답백을 공격하여 여천으로 들어가 10여 개의 성벽과 보채를 연파하고, 목정은 대세가 기울자 북송에 투항한다. 하주 전투의 공으로 소선사, 가주방어사가 더해진 데 이어 경사로 돌아온 후, 내시성 압반으로 승진하고 황성의 사직을 담당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