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헌(송나라) (문단 편집) === [[오로벌하]] 시기 === 1081년 [[서하]]에 내분이 생기자 충악[* 충악은 열흘 치의 군량만 있으면 된다는 등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였다.]과 [[유창조]], [[고준유]], [[왕중정]][* 이헌과 마찬가지로 환관이었다.]과 함께 서하를 공략할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란저우시|난주]]를 수복하였으나[* 이후 희하로는 희하난회로로 개칭되었다.], 각 장수들 간 단합이 되지 않아 대패하고 말았다.[* 특히 왕중정은 겨우 몇 리만 행군했는데도 서하의 국경으로 진입했다고 허위보고했다.][* 유창조는 고준유의 통제를 받았는데, 유창조는 용감하게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공성병기가 부족했다. 그러나 고준유는 무리하게 싸움을 독촉하였고 서하가 황하의 제방을 터트려 북송군 대부분을 몰살시켰다.] 그리고 총사령관이었던 이헌의 부대가 영주에 도달하지 못해 각 부대가 갈팡질팡하였다. [[오로벌하]] 때 참전한 장수들 대다수가 강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헌은 희하로의 대군을 보존한 공이 있다 하여 죄를 면하였다.[* 사후에 이헌은 이번 군사적 패배가 이만저만이 아님을 알고 급히 신종에게 상소하여, 한편으로는 자신이 난주·회주를 개발한 공로가 있음을 강조하고 또 한편으로는 중간에 막혀 흥, 영 이주로 예정대로 갈 수 없었다는 핑계로 최대한 다른 장수들에게 죄를 뒤집어씌워 공을 가로채려 했다.] 이 패전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이헌은 대군을 재기하여, 병력을 경원 일대에 집중시키고, 서녕재에서 요새를 설치하여 오사성에 도착하여, 군대를 주둔시켜 방어하고, 서하를 토벌하여, 공적을 만회할 것을 주장한다. 재상 왕규가 이에 동의하나, 왕안례의 반대가 있었다. 그럼에도 이헌은 이를 강행하는데, 백성들은 지난번 징용된 사람들의 대부분이 굶주려 죽는 것을 보고 다시는 군량미를 운반하기를 꺼렸다. 부역을 피하기 위해 백성들은 산속에 들어가 스스로를 지키며 지시를 듣지 않았다.[* 관리가 산속으로 몰아넣고 툭하면 구타했고, 해주(지금의 산시 운성) 일대에서는 현령이 백성을 모집하지 못하는 현상도 있었다.] 또 다른 환관 이순거는 이헌의 소행에 불만을 품고 신종에게 상소하자 그제서야 이헌에게 군사를 그만두고 백은과 비단 4천을 주고, 경원로경략안무제치사로 임명하고, 위사 300명을 배정하였는데, 이헌은 다시 희하로로 돌아와 진봉로의 병마를 통제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