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헌(송나라) (문단 편집) === 영락성 전투와 난주 방어 === 서하가 북송 오로의 대군을 격파한 후 북송 국경 지역의 침탈은 더욱 자행되었고 이를 막기 위해 1082년 7월, 송 신종은 사중 [[서희(송나라)|서희]]와 내시 이순거에게 변을 순시하도록 위임하여 충악과 상의하여 하(夏), 은(銀), 석(石)의 3개 주의 경계에 영락성을 건설케 하였는데, 또 이헌과 서희로 하여금 이를 돕게 한다.[* 충악이 수원 부족을 이유로 반대하나, 신종은 듣지 않고 오히려 서희에게 병사들을 이끌고 공사를 시작하여 14일 안에 성을 수리하라 명한다.] 서희는 영락성을 쌓은 후, 부총관 곡진을 남겨두고 10,000명의 병력을 주둔시킨다. 영락성의 축조는 서하에 큰 위협이 되었고 서하가 30만 군대를 이끌고 영락성을 공격한다. 서희는 여러 장수들과 함께 성으로 올라가 두리번거렸지만, 서하군이 들판을 가득 메운 것을 보니 끝이 보이지 않았다. 서희는 군사도 모르고, 공을 탐내 만 명의 병사로 성 아래에 진을 쳤는데, 결국 패잔병이 성 안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영락성은 서하군에 둘러싸여 수원을 차단당했다.[* 성 안의 병사들은 말똥을 갈아서 즙을 내어 마셨고, 대부분의 사망자는 갈증이 난 상황이었다.] 서하는 또 두 부대를 파견하여 이헌과 [[심괄]]의 두 지원군을 가로막았고, 충악은 이에 원한을 품고 구원하지 않았다.[* 충악은 그 와중 병사한다.] 그 후, 서하군은 비를 타고 밤에 급히 공격했고, 영락성은 마침내 함락되었고, 송군은 서희를 포함한 수만 명의 사졸이 전사하고, 230명 이상의 관리들을 잃게 된다. 1083년 [[영락성 전투]] 이후 서하군이 난주를 공격하였고 서문관을 처음으로 파괴하였다. 병마검할 왕원욱은 결사대 700여 명을 모아 밤중에 매달아 성을 내려 단도를 들고 서하군의 진영을 급습하여 서문관을 탈환할 수 있었으나 이헌은 성을 제대로 지키지 못해 선경으로 좌천되었다. 이헌은 난주의 지리적 위치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으며, 서하가 여러 차례 군사를 모았음에도 불구하고 평안한 척하며 중병을 모아 대대적으로 공격할 기회를 노렸다. 그래서 성을 쌓고 벽을 지키라고 명령했고, 성 수비 기구를 쌓아두고 적극적으로 성을 지킬 준비를 했다. 이듬해 겨울, 서하가 난주로 대거 진격했고, 기병대는 80여만 명이라고 불렸다. 이헌의 충분한 준비로 서하 포위전은 10여 일 동안 함락되지 못하였고, 결국 군량과 마초가 부족하여 군대를 철수하였다. 신종의 조서가 이헌에게 알리골과 연락하여 협공하자, 그는 다시 정기를 뽑아 추격하여 과연 승리를 거두었다.그러나 이헌은 뒤늦게 큰 공을 세워 조정 대신들을 격분시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