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현세 (문단 편집) === 만화방 체제의 개편 === 1982년 [[공포의 외인구단]]의 성공은 당시 가장 규모가 컸던 만화시장인 [[만화방]]의 시장구조를 근본적으로 뒤바꾸었다. 공포의 외인구단 이전에는 대부분의 작품이 단편 위주였는데, 이는 빨리 완결을 보고 싶어하는 독자의 요구, 책을 갖추기 쉽다는 업주의 요구, 현금 회전이 빠르다는 출판사의 요구를 모두 충족시키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공포의 외인구단의 성공으로 말미암아 독자의 요구가 "장편은 좋지만 완결은 빨리 보고 싶다"는 방향으로 변화했다.[[http://www.komacon.kr/dmk/manhwazine/zine_view.asp?cateNum=414_13&seq=2099|#]] 이로 인해 출판사에서는 장편을 빨리 완결지을 수 있는 작가들을 선호했고, 작가들은 이러한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스토리, 작화, 배경 등 분업 체제를 도입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분업 체계 자체가 "만화방 시스템"이라는 용어로 굳어졌다. 분업이 나쁜 것만은 아니지만 문제는 빠른 완결을 위해 작품 질이 저하되었다는 점[* 다만 그 이전에도 대본소 만화의 질이 좋았냐면 그건 아니었던것이 사실 1970년대 당시에는 독점출판사가 횡포를 부리며 만화가를 착취하던 시기였고 표절도 강요했을 정도로 막장이었던 시기였기는 하다. 이현세는 그 막장시기에서 벗어나면서 빛을 본 경우라 할수있고.]과 이름만 달 뿐 작품에 손도 대지 않는 일부 작가에 의한 착취 구조가 발생했다는 점이다. 유명 작가의 경우도 직접 작품을 관리하는 A팀과 그렇지 않은 B팀으로 나누는 경우가 많았다. 공포의 외인구단 성공 신화는 이러한 장편 만화방 만화를 모두 이현세의 아류로 만드는 부작용도 일으켰다. 이현세는 모작들에 민감하게 반응했고[* 이후 대본소 시스템의 대부로 떠오른 [[박봉성]]의 경우도 이현세 캐릭터 모방으로 시작하였으나, 출판사 사장과 [[장태산(만화가)|장태산]]의 주선을 통해 이현세로부터 캐릭터 사용에 대해 묵인받았다.], 1984년 까치, 엄지, 마동탁을 의장 특허 등록하였다.[[http://home.sejong.ac.kr/~se9336/1.html|#]] 1980년대 후반에는 이현세 프로덕션을 설립, 문하생들에게 독립의 기회를 주는 한편 이현세 아류들과의 전쟁을 선포했으나 독립한 문하생들이 경쟁에서 이기지 못해 결국 1990년대 초 이현세 프로덕션을 해체했다. 당시 유일하게 성공적으로 독립한 문하생이 박원빈으로[* 공포의 보디체크, 스트라이커의 전설 등이 "글:이현세"를 달고 출간되었다.], 이후 박원빈은 야설록이 스토리를 맡은 제2의 킬러 시리즈로 대본소 만화를 모조리 [[느와르]]물로 바꿔놓는 대박을 터뜨렸고[* 그러나 박원빈도 일본 만화 표절을 많이 저질렀다. [[보스의 두얼굴]]을 그대로 베낀 [[꿇어! 보스의 두얼굴]]이라든지 여러 느와르가 일본만화를 베끼면서 욕먹었고 대본소 만화가 시들해진 2000년대 와서 묻혀졌다.], 이현세는 오히려 이에 영향을 받아 회색도시를 통해 느와르물 대열에 합류하였다. 이로 인해 작가들의 작품들이 개성 없이 획일화된 데다 1990년대 초반 일본만화 개방 전 해적판들의 범람과 도서대여점 출현 및 만화방 폐점, 1990년대 후반 청소년보호법 발효로 인해 경쟁력을 잃었고, 이현세도 1990년대 중반 만화방 시스템 탈피를 선언하고 잡지 및 신문 연재에 집중했다. 그 밖에 [[문정후]]와 [[김성모]]가 이현세 문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