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호철(독립운동가) (문단 편집) == 생애 == 1901년 10월 29일 충청남도 홍산군 대야면 신동리(現 부여군 홍산면 조현리 식송마을 51번지)의 중류 가정에서 아버지 이병승(李炳升, 1860. 2. 26 ~ 1932. 3. 29)과 어머니 [[풍천 임씨]](1874. 9. 1 ~ 1945. 10. 20) 사이에서 3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부여군 홍산면 조현리 식송마을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5247&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15998&actionType=det&flag=2&search_region=|59번지]]로 이주했고,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5143&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35655&actionType=det&flag=4&search_region=|99번지]]로 이주해 [[http://db.history.go.kr/id/im_108_11053|본적을 옮기기도 했다]]. 보통학교 졸업 후 상경해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1919년 [[경기도]] [[경성부]]에서 [[3.1 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참여한 뒤 자퇴했다. 1923년 말 [[일본]]으로 유학해 [[니혼대학]] 전문부 [[정치학과|정치과]]에 입학했고, 이때 [[재일 조선인]]들을 모아 대한독립의 정당성을 인식하도록 하고 민족정신을 고취했다. 또한 적위(赤衛)노동조합, 조선공존회(朝鮮共存會), 조선노동자조회(朝蘇勞動自助會) 등의 단체에 가입해 이 중 조선공존회에서는 간부를 역임했으며, 조선의 자치권 획득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결사 신화회(新和會) 결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928년 4월 니혼대학을 졸업하고, 1930년 1월 귀국했다. 이후 1931년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2086|노명우]](盧命愚) 등 [[사회주의자]] 동지들과 함께 합법단체인 농민조합을 조직하고자 계획했으나, 당시 일본 경찰의 탄압이 엄중하자 그해 10월 충청남도 부여군·[[서천군]]·[[논산시|논산군]]·[[홍성군]] 등을 중심으로 비밀결사 [[http://db.history.go.kr/id/su_010_1933_12_07_0210|공산주의연구협의회]](共産主義硏究協議會)[* [[http://db.history.go.kr/id/hdsr_013_0730|부여공산주의자협의회]](扶餘共産主義者協議會), [[http://db.history.go.kr/id/hdsr_013_0710|금강공산협의회]](錦江共産協議會), [[http://db.history.go.kr/id/tcmd_1935_10_15_0030|충남공산당협의회]](忠南共産黨協議會), [[http://db.history.go.kr/id/tcmd_1935_11_20_0030|조선공산주의자협의회]](朝鮮共産主義者協議會), 금강문인회(錦江文人會)라고도 한다.]를 조직했다. 이후 부여군 홍산면을 비롯한 부여군 각지의 마을에 공산주의연구협의회의 지부를 조직한 뒤 농민들을 위한 [[야학]] 및 [[노동조합]]을 개설하고 가난한 집안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계몽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각 마을의 야학을 연합해 수시로 연합 토론회 및 운동회를 개최해 [[공산주의]]를 선전하는 노래를 부르게 하는 등 계급의식을 고취했다. 이후 1931년 12월에는 [[중화민국]] [[길림성]] [[용정시|연길현 용정촌]] 제4구로 건너가 용정촌 대성중학교(大成中學校)에서 잠시 교사로 근무하면서 주로 공산주의 관련 독립운동에 종사했다. 1933년 6월에는 잠시 귀국했다가 [[만주국]]으로 건너갈 계획을 세웠으나, 그해 8월 10일 충청남도경찰부에 체포되었다. 1933년 12월 7일 부여공산주의자협의회 관련자 30여 명 중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7902|유기섭]](柳基燮)·노명우(盧命愚)·[[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1638|노명우]](盧明愚)·[[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4699|강병국]](姜秉國)·[[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4696|강성모]](姜聖模)·[[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960036|강일구]](姜日求)·[[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1817|조병철]](曺秉哲)·[[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059|조병순]](曺秉順)·[[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958489|강도형]](姜道馨)·[[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958496|강주구]](姜柱求)·[[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964976|장창선]](張昌善)·오기영(吳祺泳)·최재봉(崔在鳳)·전영철(田泳喆)·김임술(金壬戌)·허원룡(許元龍)·유인철(柳寅喆)·강병환(姜秉煥) 등 18명과 함께 [[기소]][[http://db.history.go.kr/id/npda_1933_12_09_x0002_1080|되어]] 공주지방법원 검사국에 [[http://db.history.go.kr/id/su_010_1933_12_07_0210|송치되었다]]. 1935년 6월 12일 공주지방법원의 예심에서 이른 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공주지방법원의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5143&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35655&actionType=det&flag=4&search_region=|공판에 회부되었고]], 1935년 10월 15일 공주지방법원에서의 1회 공판이 [[http://db.history.go.kr/id/hdsr_013_0730|개정되었다]]. 결국 1935년 11월 20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이른 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 [[집행유예]] 5년을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5247&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15998&actionType=det&flag=2&search_region=|선고받아]] 곧 출옥했다. 출옥 후에는 고향 부여군에서 농업에 종사하면서 교사로 근무했고, [[8.15 광복]] 후에 우익 정치인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1948년 5월 10일 치러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충청남도 부여군 을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김철수(1906)|김철수]]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이후 1948년 10월 18일 [[대한국민당]] 창립준비위원회에 지방부 창립위원으로 [[http://db.history.go.kr/id/dh_008_1948_10_18_0060|참여했고]], 호서대학 [[교수]]를 역임했다. [[1952년 지방선거]]에서 [[충청남도의회]] 의원에 출마해 당선되었고, 임기가 끝난 뒤에는 출가해 [[승려]]가 되었다. 1954년 5월 20일 치러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충청남도 부여군 을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자유당]] [[조남수]]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이후에는 정계를 은퇴하고, 승려로 생활하다가 1971년 12월 9일 충청남도 부여군에서 별세했다. 몽양 [[여운형]]계로 불리는 자생적 사회주의자 경향이 있어 독립운동으로서 [[https://www.100ssd.co.kr/news/articleView.html?idxno=2661|인정받지 못하다가]] 1987년 뒤늦게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고,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1995년 5월 11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되었다.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금성산 남령근린공원에 이호철의 독립운동 공적을 기리는 '애국지사 원인 이호철선생 기념비(愛國志士原人李戶喆先生紀念碑)'가 건립돼 있으며, 저서로 『回顧錄』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