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홍장 (문단 편집) == 평가 == [[과거 제도|과거]] 출신이라서 고리타분할 것 같지만, '''새방해방(塞防海防)을 두고 [[좌종당]]과의 논쟁에서 보듯이 이홍장이 보는 국제 인식은 대체로 정확했다.''' 1870년대 청나라 조정을 둘로 갈라놓았던 새방해방 논쟁에서 이홍장은 영국, 좌종당은 러시아를 가상적국으로 삼을 것을 주장했다. 두 나라 모두 야금야금 중국의 이권이나 영토를 삼키고 있었는데, 이홍장은 해양세력인 영국이 더 중국에 위험하다고 본 것이다. 당시 영국과 러시아의 국력차이를 보면 아직 시베리아를 넘어 극동에 군사력을 투사하기 힘든 러시아보다는[*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한참 뒤인 1898년에야 완성되었다.] 강력한 해군을 투사할 수 있는 영국이 중국에 더 위협적이었다. 이홍장은 건륭제 시절 손에 넣었지만 툭하면 반란이 일어나고 대부분의 지역이 사막에 불과한 신장[* 현재 [[신장 위구르 자치구]].]을 러시아에 팔고, 그 돈으로 영국을 몰아낼 함대를 육성하자고 했다.[* 사족으로 만약 그랬다면 현재 [[신장 위구르 자치구]]는 중국령으로 남아있기 힘들었을 것이다. 고로 좌종당의 견해도 러시아의 역사적인 팽창주의를 보면 일리는 있었다. 또한 좌종당이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신장은 현재 자원의 보고로 중국에 중요한 지역이다보니, 중국이 외부적으론 러시아나 소련 시절부터 견제받고 내부적으론 그곳 [[위구르족]]의 독립 요구가 터져나옴에도 이를 거부하는 것 역시 이런 이유가 한몫한다.] 문제는 청나라가 제대로 된 근대 국가가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근대적 문물을 전근대적으로 운용하다보니 엄청난 실수가 있었다. 예를 들어, 통설과는 달리 [[청일전쟁]] 때 청나라군의 무기는 일본군의 무기보다 대체로 성능이 뛰어났음에도[* 당장 함대 총 배수량만 하더라도 일본 해군의 2배에 달했다. 일본 해군은 없는 7,000톤급 전함 2척도 [[북양함대]]에 존재했기에 일본 해군과 대등하게 교전할 수 있을 정도였다. 정상적인 운용을 했다면 청나라가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전쟁이었다.] 청군의 계급 체계나 조직은 명나라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전근대적인 것이었다. 결국 서양 교관들이 아무리 청군을 훈련시켜도 지휘관들이 무능했기에[* 특히나 지휘관 중 [[엽지초|섭지초]]는 공주에서 평양성으로 후퇴 한 뒤, 성환에서 여러 차례 승리를 했다는 거짓보고를 이홍장에게 하였다.] 몇몇 삽질이 겹쳐 일본군에게 참패하고 말았다.[* 무능한 지휘관들이 많았어도, [[등세창]] 같은 해군 지식에 유능한 인물이나, 비록 황해 해전에서 졸장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육지 전투에서 만큼은 지식이 빠삭했던 [[정여창]]을 배출하는 등 여러 명장들을 배출하기도 하였다.] [[청일전쟁]]에서 재기불능의 치명적인 타격을 받아 일선에서 물러났다지만, 역으로 만약 이 전쟁에서 승리하기만 했다면 청나라를 일으켜세운 위인으로 대접받았으리라 조명하는 사람들도 꽤 있다. 다만 이건 요즘 와서 하는 평가고,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중국에서 이홍장에 대한 평가는 극히 안 좋았다. 좋게 봐도 나라 말아먹은 무능 정치인, 좀 심하게 말하면 [[한간]]의 원조로 보는 케이스도 있었다.[* [[한족]]임에도 [[만주족]]이 지배층인 청나라를 위해 일했기 때문이다. 즉, 한족의 입장에서 본 시각이다.] 하지만 [[어른의 사정]]인지 혹은 [[양무운동]]이 체제 변화를 배제한 경제발전이라는 현재의 [[중국 공산당]] 정권 정책과 맞아 떨어진다고 생각했는지, 1980년대부터 이홍장에 대한 중국의 평가는 계속 올라갔다. 한국으로 따지면 인지도 차이는 있지만 [[김홍집]]과 여러모로 비슷한 면이 있다. 결론적으로 한 나라의 [[재상]]이라는 위치에 있을 만한 능력도 있었고, 청나라를 [[개혁]]할 의지와 비전도 충분한 인물이었으나 나라의 상황이 너무나도 개판이었던 것이 그에게 큰 불운이었다. 위에도 나와있듯 이홍장이라는 인물 자체는 꽤 유능했으나 당시 청나라는 군대, 경제, 내치, 외교 등 모든 것이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결국 나라 꼴이 이러니 이홍장과 몇 명이 아무리 노력해도 도저히 해결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사실 개혁을 방해하던 주요 세력 중 하나인 황실 자체를 냅두고 소극적 개혁만 부르짖으니 애초부터 태생적 한계이긴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