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화원 (문단 편집) === [[청나라]] === 이화원이 본격적인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건륭제]]의 치세 때였다. 1750년(건륭 15) [[건륭제]]는 생모 효성헌황후의 [[환갑]]을 기념해 이화원의 전신인 청의원(淸漪園)을 조영하도록 명령하고, [[홍치제]]가 지었던 원정사 터에는 대보은연수사(大報恩延壽寺)를 세우도록 했으며, 이듬해(1751) 옹산을 만수산, 서호를 곤명호라 개칭했다. 청의원은 은자 480만 냥을 쏟아 부어 공사한 끝에 1764년 완공되었다. 청의원 내에는 '[[바다]]에는 신선이 사는 봉래산(蓬萊山)·방장산(方丈山)·영주산(瀛洲山)의 세 산이 있다'는 [[중국 신화]]를 바탕으로 곤명호 위에 남호도(南湖島), 단성도(團城島), 조감당도(藻鑒堂島)를 만들었고, 강남의 풍경과 원림을 좋아한 [[건륭제]]의 취향에 맞춰 항저우의 서호를 위시해 강남 지역의 내로라하는 경승지를 모방해 이곳에 재현했다. 이로써 [[청나라]]의 황실원림으로 유명한 '3산 5원', 즉 창춘원(暢春園)·원명원(圓明園)·향산(香山) 정의원(靜宜園)·옥천산(玉泉山) 정명원(靜明園)·만수산(萬壽山) 청의원(淸漪園)을 형성해 장관을 연출했으나 [[도광제]] 때 이후 [[청나라]]의 국력이 약해지고 재정이 쪼들리면서 유지에 어려움을 겪다가 1860년(함풍 10) [[아편전쟁|제2차 아편전쟁]] 때 영불 연합군이 북경을 점령해 3산 5원을 불태우고 진귀한 보물을 약탈해 청의원의 목조 건축은 전소되어 폐허로 변했다. 하지만 [[서태후]]가 수렴청정을 시작하면서 해군 경비를 유용[* 해군 경비가 유용되었다는 건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일단 '''당시 청의 1년치 예산의 30%인 은 3천만 냥을 마구 쏟아부은 건 비판의 대상.'''], 청의원의 중건을 개시해 1884년(광서 10)부터 1895년(광서 21)에 걸쳐 공사가 진행되었고 '이양충화(頤養衝和)'의 뜻을 취해 청의원에서 이화원이라 개칭했다. 이렇게 무리를 해서 겨우 복구해놨지만 청나라는 [[청일전쟁]]에서 자업자득으로 패배했다. 1900년(광서 26) 또다시 8개국 연합군의 침입으로 훼손되었다. 이때는 [[청나라]]의 황혼기였으므로, 1902년 서태후는 [[베이징]]에 돌아온 뒤 전산(前山)과 원내의 동쪽 부분만 재보수하는 수밖에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