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회택 (문단 편집) ===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 포항에서의 우승으로 인해 이회택은 [[1990 이탈리아 월드컵]]을 준비하게 될 국가대표팀 사령탑까지 겸하게 된다.[* 당시에는 국가대표팀이 전임감독 체제가 아니었기에 프로축구 우승팀 감독이 국가대표 감독직을 겸했다.] 1990 월드컵 아시아 예선에서 이회택 감독은 1차예선, 최종예선 통틀어서 11전 9승 2무 '''아시아예선 무패로 우승(1위)하여 24개국 본선 진출'''[* 당시 1990 월드컵 ~ 1994 월드컵 아시아 예선은 아시아 전 지역 최종예선까지 통합리그전 예선이었고 아시아 예선 우승(1위)과 준우승(2위)이 월드컵 24강 본선에 진출 하는 방식이었다. 대한민국이 아시아 예선 우승(1위), 아랍에미리트가 준우승(2위)로 진출하였다. 1986 서울 아시안게임 축구에 이어 다시 아시아 지역 1위를 찍은 대회이다. 다만 월드컵 아시아 예선은 월드컵 대회 중 지역예선의 일부라서 '''우승'''이라는 개념은 없어서 이걸 공식대회 우승으로 치진 않는다.]이라는 경이로운 성적을 기록하며 팀을 월드컵 본선에 올려놓는다. 예선에서 보여준 전력이 워낙 압도적이었던 터라 세 번째 진출하는 90월드컵 24강 본선에 대해 기대가 엄청났으나. 결국 24강 조별리그에서 [[스페인]], [[벨기에]], [[우루과이]]에 속절 없이 털리며 3전 전패(22위)라는 최악의 성적으로 월드컵 도전을 끝맺는다.[* 사실 대한민국의 월드컵 도전사에서 조별리그 3경기 모두 전반전까지 상대에게 리드를 빼앗기지 않은 것은 1990년 이탈리아 대회가 유일한데, 가장 큰 성공을 거둔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2002년 한국/일본 대회]]에서도 [[히딩크호/미국전|D조 2차전]] 전반에 미국의 선제골을 허용해서 0:1로 뒤졌었다.] 사실 아시아 지역 예선에서 포스가 워낙 압도적이었던지라 외신들도 한국을 다크호스로 많이 꼽았다. 특히 긴 머리를 휘날리는 '삼손' [[김주성(축구)|김주성]]은 주목해야 할 선수로 꼽히곤 했다. 그러나 현실은 탈탈탈 털리며 오히려 아시아와 세계 축구 간의 격차만 확인시켜주는 결과를 낳았다. 그래도 소위 '아시아의 맹주'라며 아시아에서는 적수가 없던 전성기라면 전성기 시절. 이회택 본인은 이것에 대해 당시 스포츠 학자들이 1주일 전에만 가도 시차에 적응하기에는 충분하다고 데이터를 내세우면서 주장을 하는 통에 달리 할 말이 없었고 협회도 1주일 전에 가도 괜찮다니까 그냥 1주일 전에 이탈리아에 갔다고 한다. 그러나 이회택은 1주일 더 일찍 가서 못 해도 현지 클럽 팀이나 다른 국대 팀과 평가전도 좀 갖고 컨디션 조정도 더 잘하고 그랬으면 16강은 몰라도 좀 더 좋은 경기를 했을 텐데 데이터에 밀려서 그러지 못했던 것이 지도자 생활 최대의 한으로 남는다고 증언하고 있다. 비록 [[툴리오 라네세|심판]]의 이해할 수 없는 편파판정으로 [[윤덕여]]가 퇴장 당하고 [[다니엘 폰세카]]의 골 상황이 오프사이드인데도 골이 인정된 것 때문에 패배했지만, 마지막 우루과이전에서야 컨디션이 올라와서 우루과이와는 어느 정도 대등한 경기를 했던 것이 그 증거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과는 별개로 정보전에서 무력해서 상대 팀이 어떤 축구를 하는지 알 수가 없었고, 세계 무대의 전술과 동 떨어져 있었는데 [[압박 축구]]를 접해보고 대응이 곤란했던 점 등등이 아쉬웠다고 한다. 여담으로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이 대회에서 대한민국은 유럽팀 불가리아에게 1:1무승부로 월드컵 본선 첫 승점을 획득하며 첫 승점 1점 1무 2패 86월드컵 20위를 기록했다.] 주역이었던 [[정용환]], [[박경훈]], [[최순호]], [[변병주]], [[김주성(축구)|김주성]]부터 [[이영진(1963)|이영진]], [[김풍주]], [[황보관]], [[최인영]] 등 화려한 멤버에 묻혀서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이회택은 이때 한국 축구가 10년을 먹고 살 커다란 재산을 남겨줬다. 바로 [[황선홍]]과 [[홍명보]]를 대표팀에 부른 것. 당시 두 사람은 애송이도 아니고 그냥 [[듣보잡]]이나 다름없던 터라 엄청난 구설수에 시달려야 했다.[* 물론 황선홍은 당시 대학 축구계의 스타이기도 했고, 국가대표 데뷔전인 [[1988 AFC 아시안컵 카타르]]의 [[한일전]]에서도 1골 1도움을 기록하고, 월드컵 예선에서도 맹활약 했다.] 포항 시절의 업적도 그렇고 선수 보는 눈으로는 사실상 허정무 이상의 모습을 보여줬다고 할 수 있다. 이후 소속 구단 포항제철로 돌아가 1992년 프로축구 우승으로 이끈 것을 마지막으로 감독직에서도 사임하고 야인의 세월을 보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