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익산시 (문단 편집) === 도시의 위상 === 익산이 '''[[전라북도청]] 소재지'''가 될 '''뻔'''한 적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의 이주가 증가하면서 1920년대에는 도청을 이리로 이전하기 위한 시민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그리고 해방 후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에 전주의 전라북도 경찰국 무기고가 화재로 폭발하면서 그 불똥이 바로 앞의 도청으로 옮겨 붙어 건물이 불타버렸다. 그래서 도청을 새로 건축하게 되었는데 이때 도청을 전주에서 교통의 요지 이리로 이전하여 신축하는 방안이 제기되었고 이것이 뜻밖의 호응을 얻은 것. 도의회에서 이를 두고 표결에 들어간 결과, '''단 한 표''' 차이로 전주 현 위치에 신축하기로 결정났다. 그 결과 도청은 2005년 전주 [[서부 신시가지]]로 이전할 때까지 전주시 중앙동에 계속 남게 되었다. 만약 정말로 당시에 도청이 이리로 이전했다면 도청소재지 버프에 [[익산역]]과 [[호남고속도로]]가 있다는 점까지 결합해 [[광역시]]로 성장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반대로 도청을 이전했다면 1977년 [[이리역 폭발사고]] 때 파손되었을 가능성도 크기에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어쨌든 익산시는 철도 교통의 요충지로 발달했지만, [[대한민국 철도청|철도청]]의 [[경부선]] 중시와 [[호남선]]과 [[전라선]]이 여객 열차를 많이 넣기에는 부족한 단선이라는 것이 발목을 잡았다. 결국 익산역이 쇠퇴함은 물론 전라북도의 철도교통 또한 쇠퇴하여 익산시는 발달이 정체되었다.[* 그나마 [[호남선]]이 1988년에 [[광주송정역|송정리역]]까지 복선화가 이루어지지만 익산 이남의 긴 배차 간격은 해결하지 못했다. 2003년에 호남선이 완전히 복선화가 되고 2004년이 되어야 [[KTX]] 개통으로 KTX가 호남선 기존선 경유를 통해 [[목포역]]까지 들어오면서 해결하였다.] 새만금의 영향으로 전북 인구 3위인 [[군산시]] 인구수가 늘 가능성이 있어서 익산시의 [[전라북도]] 2위 도시의 위치가 흔들릴 뻔했지만, 인구 증가 가능성을 앞두고 27만 명대를 유지하던 군산 인구는 오히려 익산과 마찬가지로 감소추세가 되어 당장 실현은 어려워졌다. 그나마 군산시는 추후 새만금 간척지에 대형 산업단지들이 줄줄이 들어서 유입인구가 늘어날 가능성이 아직은 있지만, 익산시는 그런 호재도 없어서 도시가 쇠퇴해가는 추세가 수십 년째 이어진다. 2010년에는 30만 2천 명, 2021년 7월에는 27만 9천 명대로 줄어들어 선거구가 한 개가 될 상황에 처했다. 위의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익산이 '''전북 제2의 도시'''임에도 다른 지역에서는 [[군산시]]에 비해 인지도가 밀리는 듯하다. [[박명수]], [[김수미]] 등으로 대표되는 대중들에게 알려진 군산 출신 유명인이 많아서 그런지 전주 혁신도시를 빼고는 전북의 신도시인 탓이 클 것이다. [[전북일보]]나 익산신문 같은 지역언론에 의하면 익산시에서 내세우는 브랜드가 애매모호한 상황이라고 한다. 보석도시라는 이미지는 보석가공산업이 사양길로 들어들면서 뻘쭘해졌고, [[미륵사지]] 등을 내세운 [[백제]]의 고도 역사의 도시라는 이미지는 비슷한 이미지를 가진 경주나 공주에 비하면 유적이 적은 편이라 분위기가 안난다. 이래서 황등석재를 내세워 돌의 도시, 정책적으로 여성친화도시 등 온갖 브랜드를 만들어 홍보하고 다니고 있는데 별 효과가 없다는 것. 확고한 브랜드가 없고 이도저도 아닌 이미지만 만들다보니 오히려 익산시의 이미지적 정체성이 점점 모호해진다는 얘기라고 한다. 사실 익산시민들 입장에서도 시에서 이렇게 자꾸 만들어내는 이미지들이 별로 공감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익산 소재의 한 대학교의 모 교수는 익산에 [[무왕]]을 프랜차이즈화하자면서 [[진시황]] 동상 얘기를 꺼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