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익선관 (문단 편집) == 유래 == 익선관의 유래는 [[복두]]로부터 시작되었다. 복두는 [[위진남북조]] [[북주]] [[무제]] 때 건(巾)으로 머리를 감싸 묶기 시작한 것에서부터 출발하였다고 전해진다. [[당태종]] 시기부터의 복두는 건자(巾子)라는 상투에 씌우는 틀을 만들고 여기에 사각형의 검은 직물로 덮어 이마 윗부분까지 감싼 후, 머리 뒤편으로 4가닥으로 모았다. 그리고 그 중 2가닥은 다시 앞쪽으로 당겨 묶었고, 나머지 2가닥은 뒤에서 묶어 아래로 내려뜨려 앞뒤로 각각 날개 모양을 만들어 완성시켰다. 앞쪽의 날개는 문(文)을 상징하고 뒤쪽은 무(武)를 상징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시기에 따라 건자(巾子) 재질과 모양을 달리하여 복두의 외형에 변화를 주었다. 처음에는 이렇게 머리를 감싸는 건(巾)의 성격이었으나 뒤로 가면서 모체를 만들고 뒷면에는 철사를 이용하여 날개를 만드는 [[사모]]와 유사한 관(冠)의 형태로 변해갔다. 그렇게 되면서 모자 앞쪽으로 묶었던 날개는 더이상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에 퇴화하여 작은 장식으로써만 남게 되었다. [[명나라]], [[조선시대]]의 [[사모]] 그리고 익선관의 모체 앞부분에 매듭처럼 장식된 것들은 바로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 [[파일:external/img2.paigu.com/68215809.jpg|width=680]] || || 원시적인 복두 착용법[* 상투에 씌우는 건자(巾子)의 모습을 달리하여 모양을 굽히거나 높일 수 있었다.] || 익선관은 [[당나라]] 시기의 기록에서 처음 보이는데 [[당태종]]이 삭망(朔望)·시조(視朝)의 때 사용할 관모로 익선관을 제정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전해지는 그림 자료에서는 [[당태종]]이 [[복두]]를 쓰고 있는 모습만 보이기 때문에 당시의 익선관이 날개가 솟아있는 [[명나라]]와 [[조선]] 때의 모습과 유사했는지, [[복두]]와 별다를 것이 없는데 이름만 달리했는지의 여부는 불분명하다. [[송나라]]시대의 기록에 의하면 [[당나라]]시대 복두는 황제의 것은 날개가 위로 꺾이고 신하들의 것은 아래로 내렸다 하였는데 이 것 역시 [[당태종]] 시기부터 적용할 수 있는지 마땅한 근거를 확인할 수 없다. 다만 [[당나라]] 기록에서 익선관을 제정하고 착용할 당시에 총신(寵臣)들에게는 진덕관(進德冠)을 하사하여 착용하게 했다는 것을 보면 진덕관과 유사하게 생겼을 가능성도 있다. [[당나라]]의 복제를 받아들인 [[통일신라]]나 [[발해]]에서도 비슷하게 사용했을 수도 있으나 확인하기 어렵다. 729년 [[당현종]]이 폐지하였다고 전해진다. [[송나라]] 시대에는 황제의 상복(常服)에 쓰는 관모로 조사절상건(皂紗折上巾)을 착용하였다. 본래 절상건(折上巾)은 날개(각 또는 뿔)가 위로 솟은 형태를 말하나 [[송나라]]에서는 기본적으로 황제와 신하 모두 평평한 형태의 평각(平角)을 사용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송나라]] 황제는 각이 위로 솟은 절상건을 병행하여 쓰기도 하였다고 전해진다. 신하들의 관모는 단순히 [[복두]]로 불렸다. 비슷한 시기 [[고려]] 군주는 [[고려도경]]에 따르면 오사고모(烏紗高帽)를 쓴다고 알려져 있다. 이름대로 풀이해보면 검은색의 높은 형태의 모자로 보이나 구체적인 모습은 알 수 없다. || [[파일:external/pic.baike.soso.com/20110830184623-2060739456.jpg]] || || [[후당]] 황제 [[이존욱]] 초상. 여기 나온 모자가 절상건이다. || [[명나라]]는 1370년에 황제의 관모로 오사절각향상건(烏紗折角向上巾)을 정하였는데 [[원나라]]시대에도 [[복두]]제도가 폐지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이를 바탕으로 [[당나라]]와 [[송나라]] 제도를 참고해 가면서 신하들의 [[사모]]와 함께 손쉽게 만들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에서 [[홍무제]]가 건국 당시에는 [[원나라]]의 모자를 쓰기도 하였다는 것을 보면 제도가 본격적으로 마련되기 전까지는 [[원나라]] 관복도 혼용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405년(영락 3년)에 제도 재정비 끝에 익선관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익선관에 황반령착수포[* 黃盤領窄袖袍 . 반령(盤領)은 원령(圓領)보다 옷깃이 좁고 높은 형태이며 착수(窄袖)는 좁은 소매를 말한다. 가슴과 등, 양측 어깨에 금룡이 하나씩 직성되었다. 뒤로 가면서 원령(圓領)을 쓰고 넓은 소매인 대수(大袖)가 유행하게 된다.]를 입고 옥대를 매고 피화(皮靴)를 신었다. [[명나라]] 황태자의 관모도 처음에 오사절상건(烏紗折上巾)으로 부르다가 영락 3년(1405년)에 오사절각향상건(烏紗折角向上巾)으로 다시 익선관으로 명명했다. 친왕(親王)·군왕(群王) 친왕세자도 같았다. || [[파일:external/ww4.sinaimg.cn/0065zVshgw1farx269ta4j30jg0t541j.jpg|width=200]] || [[파일:external/ww3.sinaimg.cn/0065zVshgw1farx27nzraj30jg0t878g.jpg|width=200]] || ||<-2>[[홍무제]]의 10남 노황왕(魯荒王) 주단(朱檀)[* 생몰년 1370년 3월 15일 ~ 1390년 1월 2일] 무덤에서 출토된 오사절상건 2정.[* 오른편의 오사절상건이 [[태조 이성계]]의 것과 흡사하다.] || [[조선시대]] 형태의 익선관은 [[우왕]] 때 명나라의 관제를 받아들이면서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이전에 고려는 송의 관복을 사용했고, 이후 원의 관복을 사용했다가 [[공민왕]] 때 다시 폐지했다는 건 유명한 이야기다.] 다만, 여기서 생각해볼 부분이 있는데 [[명나라]]는 [[공민왕]] 말기에 군주의 면복과 조복, 신하들의 제복(祭服)은 하사해주었으나 평시 집무복인 상복(常服)[* 고려사에서는 이를 뭉뚱그려 편복(便服)으로 칭함.]은 지속적인 요청에도 계속 사여해 주지 않고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고려사]]의 설장수와 [[홍무제]]의 대화내용을 통해 확인할 수가 있는데 [[홍무제]]는 상복에 관해서는 "[[고려]]가 알아서 적당히 지어입으면 그만인 것을 굳이 나에게 물을 이유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설득 끝에 설장수는 [[사모]], [[단령]] 세트를 입고 귀국하였고 [[고려]]에서는 그 관복을 보고 [[명나라]] [[관복]]제도를 시행했다. 하지만 군주가 입는 오사절상건과 용포를 가져왔다는 기록은 나와있지 않다. 가져왔다면 분명히 기록으로 있을 것이지만 [[고려사]] 여복지에서도 확인할 수가 없는 부분이다. [[명나라]] [[관복]]제도가 시행되었으나 '[[우왕]]과 신하들은 그 옷을 입지 않았다'라는 기록도 보이는데 이 부분은 [[우왕]]이 신하들과 똑같은 차림새의 [[관복]]을 입기 싫어했다는 것인지[* 왜냐하면 [[사모]], [[단령]]을 가져와서 그 샘플을 보고 명제(明制) [[관복]]을 만들었는데 군주가 신하와 똑같은 것을 입으면 품위가 안 산다. 좀 예외적인 경우지만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정종(조선)|정종]]과 [[태종(조선)|태종]]이 각각 군주의 자리에 있을 때 [[사모]]와 [[단령]]을 입은 기록이 2건 있기는 하다. 전자는 종묘에 제향(傳香)할 때 그렇게 입고 나왔다가 대신들에게 앞으로는 면복을 입으셔야 한다며 한소리 듣기도 했으며, 후자는 즉위 후 고명을 가져오는 명나라 사신을 맞이할 때였다. 고명 받은 후에 면복을 입었다고 하니 이들은 아주 잠깐의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오사절상건과 용포를 별도로 제작하였는데도 거부한 것인지를 자세히 확인할 수가 없다. 다만, 기록에서 일부 관료들은 [[명나라]] [[관복]]을 거부하고 호복(胡服)을 고집하였다는 것이 꽤 보이는 점, [[우왕]] 역시 신하들에게는 [[명나라]]의 제도를 잘 따라야 한다고 해놓고는 호복(胡服)을 입고 말 타고 달렸다면서 호복을 입은 것이 강조되거나, 철령위 사건 이후로는 백성들에게 [[변발]]을 하게 하고[* 원래 [[원나라]]가 망했어도 [[고려]]에서는 [[변발]]을 했던 백성들이 많았으나, 철령위 사건 직후 [[명나라]] 사신이 [[고려]]로 들어오자 나라에서 잠시 금했던 적이 있었다.(1388년 3월) 그러나 4월에 요동정벌을 시행하게 되면서 [[원나라]] 풍색을 하도록 하였다. 이것들은 2개월 이내로 위화도 회군(5월)과 군주 교체(6월)가 이루어지면서 다시 금지되었다.] 신하들에게는 [[원나라]] [[관복]]을 입게 하였으며, [[원나라]] [[연호]]를 다시 쓰게 했던 것을 보면 [[우왕]]은 오사절상건을 쓰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설장수와 [[홍무제]]의 대화내용 중에는 또 이러한 부분이 있는데, 설장수가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던 중에 [[우왕]]이 압록강까지 사람을 보내서 반드시 [[명나라]] [[관복]]을 얻어올 것을 다시 한번 간곡히 강조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사모]] [[단령]]을 입은채로 돌아오면 모든 관료들에게 착용하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때는 설장수 이전에 [[명나라]]로 [[관복]]을 요청하러 갔던 사신들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막 돌아왔던 때로 [[우왕]]이 황망해하며 다음으로 출발했던 설장수에게 급하게 사람을 보냈던 것이다. 그렇게도 간절히 원했던 [[관복]]을 얻었건만, 거부했다는 [[우왕]]의 마음은 참으로 알 수 없다. 어쨌든 이 대화내용에서도 군주의 [[관복]]을 요청했다거나, 관련 내용이 나오거나 하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다.] [[고려사]]에서는 [[위화도 회군]] 이후 [[우왕]]이 물러나고 [[창왕]]이 즉위하면서 '전하께서 친히 중화의 제도를 따랐다'는 기록이 [[관복]] 이야기를 하면서 나온다.[* [[고려사]] [[조준(조선)|조준]] 열전 참고 바람.] 이런 것을 본다면 [[창왕]] 때부터 본격적으로 [[명나라]] 제도의 오사절상건과 용포를 입었을 수도 있다고 보여진다. [[조선]]에서는 [[태종(조선)|태종]]시기에 명나라에서 익선관(翼善冠)이라 부르면서 이 이름이 굳어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 오사절각향상건의 모양이 [[매미]]의 날개 모양과 닮았다 하여 '매미 선(蟬)'을 써서 익선관이라고 했다는 설도 있다. 중국에서는 선(善)자가 익선관의 모양을 상징한다고도 한다. 선(善)자에서 구(口)자가 익선관의 전면부인 전옥(前屋)을, 나머지는 후면부인 후산(後山)과 날개인 절각(折角)을 닮았다는 것이다. || [[파일:익善관.png|width=200]] || || 익선관 善자의 의미 || 한편, [[조선왕조실록]]에서는 1444년에 명나라로부터 익선관을 한차례 사여받은 유일한 기록이 보인다. 보통은 면복이라던가 강사포 같은 급이 높은 [[관복]]만 사여해줬으나 이 때는 특별하게도 면복에 익선관 1정과 그와 함께 입는 상복(常服)용 [[곤룡포]] 3습을 서비스로 보내온 것이다. [[세종대왕]]도 이 사례는 전에는 없던 일이라며 기뻐하였다고 전해진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조선)|세종]] 26년(1444년) 3월 7일 1, 2번째와 14일 1번째, 26일 2번째 기사 참고 바람.]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