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익안대군 (문단 편집) == 생애 == 1392년(태조 원년) 조선이 개창되어 태조가 즉위하자 이방의는 익안군(益安君)에 봉해졌다. 1398년(태조 7년) 8월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을 때 이방원을 도와 정사공신 1등에 봉해지고 공신전 200결을 받았으며 12월에 이방원, 이방간과 함께 개국공신 1등에 추록되어 다시 공신전 200결을 받았다. 이 때 중군절제사가 되어 이방원, 이방간과 함께 중앙군의 병전을 분장하고 1399년(정종 1년) [[경기도]]와 [[충청도]]의 지방군을 관장하였다. 1400년(정종 2년) 2월에 [[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병으로 집에 있다가 소식을 듣고 이방간의 모반을 개탄하면서 절제사직을 사임하여 이방원을 간접적으로 도왔다. 1401년(태종 1년) 익안대군(益安大君)으로 봉해졌으며[* 덕분에 이성계의 아들 중 제대로 살아서 대군에 봉해진 아들이다. 정종과 태종은 [[세자]] 책봉 및 왕으로 즉위한지라 이전 호칭은 '군' 혹은 '공'이며 나머지는 사후에 '대군'으로 봉해졌다.] 이후 병으로 인하여 [[사망]]하였다. 사망 당시 태종은 크게 슬퍼하며 조회를 정지하고 직접 형의 [[장례식]]에 문상을 와서 형의 장례식에 후한 [[부조금]]과 지원을 해줬다.[* 일반적으로 대신이나 종친이 사망하면 왕이 부조금으로 [[쌀]]과 [[종이]]를 전달하고 조회를 3일 정도 정지하지만 이렇게 왕이 직접 문상을 오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필시 본디 서열로 보면 정종 시절 왕위 승계 1순위이고 적통인 아들까지 있었음에도 그냥 한참 동생인 태종에게 왕위계승을 양보한 것에 대한 보답이리라.] [[시호]] 안양(安襄)을 받았으며, 정종 사후에는 정종의 배향공신으로 신주가 [[종묘]]에 모셔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