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인경궁 (문단 편집) === 인조 재위기 === 신궐 중에 인경궁은 바로 사용하기엔 정치적 부담이 컸다. '''[[광해군]]의 신궐 영건은 인경궁에서 시작되었고,''' 반정 당시에도 마무리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반면 [[경희궁|경덕궁]]은 인경궁 영건에 부수적으로 시작되었고 먼저 완료되었다. 그 결과 궁궐 영건을 폐정으로 비판할 때 그 초점은 인경궁에 있었다. 인경궁은 광해군의 [[궁궐]] 영건의 비판하는 측에서 항상 먼저 거론하는 폐정의 상징이 되었다. > 신들이 그윽이 생각하건대 '''인경궁(仁慶宮)은 백성의 고혈(膏血)을 짜내어 10년을 경영해 왔으니, 반정(反正)한 뒤에 즉각 훼철(毁撤)했어야 마땅한데, 지금까지 그대로 두어 한갓 수직(守直)하는 폐단만 끼치고 있습니다.''' 창롱(窓櫳) 등 철물(鐵物)을 태반이 도둑 맞았는가 하면 쓰다 남은 목재와 기와도 날마다 썩어가고 있는 형편입니다. 따라서 지금 전각(殿閣)을 훼철하여 쓰다 남은 목재와 기와를 합쳐 화매(和賣)하고 집터를 본 주인에게 돌려 준다면, 백성들이 마음속으로 열복할 뿐만 아니라 반드시 영접하는 비용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니, 유사에게 회부하여 따로 상명(詳明)하고 근실하고 염근(廉謹)한 사람을 가려 화매하는 일을 주관하게 하소서. >---- > 인조실록 인조 3년(1625) 2월 26일 기사 인경궁은 당대에 훼철 논의가 분분했다. 적어도 인경궁이 [[광해군]] 대 폐단의 상징임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1625년([[인조]] 3년)의 이 [[기사]]는 사용이 없는 인경궁의 피폐한 상황 및 인경궁 자체가 광해군 폐정의 표상으로 지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경궁보다 작은 공역으로 인경궁의 별궁으로 지어진 [[경희궁|경덕궁]]보다는 인경궁을 매개로 궁궐 영건의 폐정을 인식했다. 그래서 인경궁도 [[경운궁]]처럼 훼철하고 그 터를 본래 주인에게 돌려주자는 주장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그러나 인조는 [[인목왕후]] 유폐와 관련되었던 경운궁을 훼철할 때와 달리 인경궁은 그대로 남겼다. 하지만 앞서 말한 이유로 인경궁에 머물기는 어려웠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부담이 적은 경덕궁에 거처했다. 그렇게 1632년(인조 10년)까지는 경덕궁 중심의 궁궐 경영이 이어졌다. [[인조]]가 인경궁에 처음으로 임어(臨御)[* 임금이 그곳에 왕림함]한 것은 1630년(인조 8년) 3월 17일의 일이다. 인경궁에 머물던 [[인목왕후|대비]]에게 문안을 갔다가 [[비(날씨)|비]]가 쏟아져 환궁이 곤란해지자 그대로 인경궁에서 묵고 이튿날 [[경희궁|경덕궁]]으로 돌아왔다. 인목왕후(소성대비)는 3월 11일부터 풍정례(豊呈禮 웃어른에게 올리는 큰 연회)를 위해 인경궁에 머무르고 있었다. 1624년(인조 2년)에 창경궁에서 풍정례를 지내고 6년 뒤에 다시 지내기로 하면서 인경궁이 장소로 선정된 것이다. 이 때 행사 진행을 위해 방치되어 있던 인경궁 전각들이 보수되었다. 신하들은 [[후금]] 때문에 불안한 정국에 비용이 많이 드는 풍정례를, 그것도 굳이 인경궁을 보수하면서까지 진행하는 것에 반대하였고 정 치를거면 [[경희궁|경덕궁]]에서 치르라고 권했다.[* 인조실록 인조 8년(1630) 2월 14일 기사] 하지만 인조는 인경궁을 고집해 결국 관철시켰다. 3월 17일 하루 인경궁에 머문 인조는 3월 20일 다시 인경궁을 방문해 22일 풍정례를 치르고 경덕궁으로 돌아왔다. [[인조]]가 조정의 비판적인 기저에도 불구하고 인경궁에서 풍정례를 강행한 것은 이를 계기를 인경궁을 활용하기 위한 의도를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궁궐은 왕의 거처이며 왕실의 공간'''이기도 한데 [[창덕궁]]과 [[창경궁]]이 차례로 소실된 상황에서 좁은 경덕궁에만 10년 가까이 머물다보니 공간적 제약을 심하게 느껴 가까운 인경궁을 활용하는 데 관심을 가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광해군]] 폐정의 상징이라는 데 부담을 가졌겠지만, 어차피 광해군이 지은 [[경희궁|경덕궁]]에 10년 가까이 지낸데다, 불타 없어진 창덕궁과 창경궁 중건에 나서기 어려운 사정이었던 만큼, 인접한 인경궁을 활용하는 것은 효과적인 방안이었다. [[인조]]가 [[국왕]] 내지 [[왕실]] 차원에서 인경궁을 활용해 보려던 정황은 이보다 이른 1626년(인조 4년)부터 있었다. 그 해 인조의 친어머니 [[인헌왕후|연주부부인 구씨]]의 [[장례]] 때 인경궁에 혼궁[* 신주를 모시는 곳.]을 설치했다. 계운궁의 혼궁은 법도대로라면 인조의 아버지 [[정원대원군|정원군(원종)]]의 [[신주]]가 있는 [[이현궁]][* 梨峴宮. 원래는 광해군 2년(1610)에 세자빈 간택을 마치고 가례(嘉禮) 전에 세자빈이 옮겨 생활하는 별궁으로 쓰이던 곳이다. 1623년(인조 1년))에 정원군의 부인이자 인조의 어머니인 연주부부인 구씨의 거처가 되면서 궁호를 계운궁(啓運宮)으로 고쳤다. 병자호란 후에는 전란으로 집이 없어진 인조의 아우 [[능원대군]]이 이곳에서 지냈다. 1631년(인조 9년)) [[효종(조선)|효종]]과 [[인선왕후]]의 가례도 이곳에서 행했다.]에 설치해야 했다. 하지만 [[인조]]는 이현궁은 좁아서 전각 더 세울 공간도 없다는 핑계로 인경궁에 설치하도록 하였다. 계운궁은 [[이괄의 난]]때 인조와 함께 피난했다 돌아와 경덕궁에서 얼마간 지내다 사망해서 경덕궁에 빈궁(殯宮)[* 발인(發靷)할 때까지 관(棺)을 모시는 전각. 왕과 왕비의 경우에는 빈전이라고 한다. 보통 사망한 장소를 빈전으로 두었다.]을 두었다. 인경궁에 혼전을 두라는 지시는 이의 연장선이었다. 이때 [[신하]]들은 반대의견이 우세했는데 그 논리가 묘하다. >'''인경궁은 헐어버려야 할 궁이지만 명칭은 대궐입니다.''' 능원군(인조의 아우)이 상주로서 3년 동안 조석의 궤전을 주관하면서 여기에서 거처하는 것은 바단 사체에 미안할 뿐만이 아니라 궐내로 반혼한다면 사묘(私廟 조선시대 왕실의 방계에서 왕위를 계승한 왕의 생부와 생모 또는 폐위된 왕실 구성원을 제사지내는 사당)라고 할 수 없으니, 근일 조정에서 쟁론하는 일과 매우 어긋나는 조처입니다. 계운궁이 협착하다면 편의에 따라 더 축조하여 혼궁(魂宮)으로 삼는 것이 예법에 합당할 것 같습니다. 대신들의 의견도 이러하므로 감히 아룁니다. >---- >인조실록 인조 4년(1626) 2월 7일 기사 신하들의 주장은 인경궁이 폐정의 상징으로 헐어버려야 할 궁이긴 하나 [[궁궐|대궐]]은 대궐이니 법도를 지켜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때는 [[정원대원군|정원군]]이 원종으로 추승되기 전, 아직 정원대원군이던 시절이다. [[선조(조선)|선조]]가 자기 [[덕흥대원군|친아버지]] [[제사]]때 [[절(불교)|절]] 한번 못했던 것과 동일한 논리인데 아버지가 왕이 아니니 상주도 아우가 맡고, 어머니도 방계 종친을 대하는 예에 따라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같은 기사에 보이는 인조의 주장은 정반대다. >인경궁은 명색이 궁궐이기는 하지만 조종(祖宗)의 법궁(法宮)이 아니다. 계해년(1623 인조 즉위년) 이후로는 각사(各司)의 전복(典僕 노비)들도 간혹 거처하였으니 하나의 버려진 빈 곳이 되어버렸다. 이곳에다가 임시로 혼궁을 설치하는 것은 불가할 것이 없다. 그리고 능원군은 바깥 행랑(行廊)에 들어가 거처하는 것 또한 방해될 것이 없다. '''신료들은 인경궁에 대해 광해군 폐정의 상징으로 보고 궁극적으로 훼철해야 한다는 입장이 주류였지만, 일단 그곳이 대궐이라는 점은 분명히 하였다.''' 이것은 국왕이 이곳을 자의적으로 활용하는 것을 차단하려는 의도였다. 국왕이 계속 활용한다면 그대로 궁궐로 굳어지므로 훼철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반면 '''인조는 조종의 법궁도 아닌 곳, 별도 공간으로 좀 활용한다고 예법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입장이었다.''' 신료들이 인경궁에 대해 헐어버릴 곳이라고 하면서도 대궐이라고 명분을 내세운 것이나 [[인조]]가 법궁은 아니라며 왕실 차원에서 활용하고자 한 것은 당시 [[조정]]에서 인경궁을 대했던 복잡한 시선을 잘 보여준다. 인조가 광해군을 질시해서 없애버렸느니, 인경궁 훼철이 인조의 삽질이라느니 맹목적으로 부르짖기 바쁜 광해군 옹호론은 이같은 일련의 과정을 깡그리 무시하고 있다. 인조는 엄연히 [[동전]]찍는 주전청(鑄錢廳)까지 설치했던 인경궁[* 《[[승정원일기]] 12책, 인조 4년(1626) 3월 6일 기사]을 폐정의 상징이라며 내버려 두는걸 낭비라고 생각하고 왕실의 공간으로 이리저리 활용해 보려 했다. 이런 인식은 1630년(인조 8년) 풍정례를 치르러 [[경희궁|경덕궁]]에서 인경궁으로 행차할 때도 드러난다. [[인조]]는 큰 길을 이용하는 대신 경덕궁의 북문 [[경희궁 무덕문|무덕문]]을 통해 들어갔다. 경덕궁이 원래 인경궁의 별궁으로 지어진 덕에 가능한 일이었다. 큰 길을 놔두고 북문으로 드나는 것은 결국 인경궁과 경덕궁을 하나로 묶어 사용하겠다는 의미였다. 신하들은 또 반대하며 환궁 시엔 큰 길을 사용할 것을 권했지만 인조는 돌아올 때도 무덕문으로 들어왔다. [[인조]]는 인경궁 활용에 [[인목왕후]]를 이용했다. 인조 자신이 행차하면 말이 많아지지만 [[대비]]는 한결 자유롭기 때문이다. 일단 대비를 인경궁에 데려다 놓고 문안을 명분으로 자신이 행차한다면, 인경궁은 점차 국왕이 사용하는 궁궐로 굳어질 수 있었다. [[인목왕후]]는 1629년(인조 7년) 인경궁의 초정[*椒井. 우물처럼 냉천수(冷泉水)가 자연스럽게 용출되는 곳.]에 목욕하러 가서 여러 날 묵은 일이 있었다.[* 인조실록 인조 7년(1629) 7월 27일 기사] 인경궁 건립 당시 초수별당(椒水別堂)과 별전(別殿)들을 건립한 기사가 확인되는데[* 광해군일기 광해군 11년(1619) 9월 1일 기사] 아마 그 시설을 이용했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