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인경궁 (문단 편집) === 마지막 === 그런데 1632(인조 10년))에 이 같은 궁궐 경영에 파란이 일어난다. 그해 6월 [[인목왕후]]의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자 [[인조]]는 인목왕후를 인경궁으로 옮기고 자신도 건너가 병의 경과를 살폈다. 인목왕후는 인경궁에서 20여 일간 투병하다 6월 28일 사망했다. 그런데 [[대비]]가 죽은 후 인조의 조치가 좀 이상했다. 왕비의 관을 모신 빈전은 사망한 장소로 정함이 법도였는데도 굳이 경덕궁으로 시신을 옮겨 그곳에 빈전을 설치했다. 그리고 인목왕후가 연루된 역모 사건이 터졌다. [[왕족]]인 [[회은군|회은군 이덕인(懷恩君 李德仁)]][* [[성종(조선)|성종]]의 [[서자]] [[계성군]]의 증손자로 [[인조]]에겐 9촌 숙부인 종친이다.]이 고변한 역모는 다음과 같다. >회은군 이덕인이 고변하여 국청이 열리다 >'동네에 임해군의 종 아내가 때로 출입하는데, 하루는 와서 말하기를, 「나라에 큰일이 있다.」고 하기에, 내가 자세한 것을 묻자, 답하기를 「경창군이 우리 궁(宮)의 양자(養子)를 위하여 계해년 일([[인조반정]]) 을 도모하려고 술사(術士)를 조치하여 거사(擧事) 시기를 선택하였는데, '''대비([[인목왕후]])께서도 이일을 알고 있다고 한다.''' 임해군의 부인이 항상 지극히 걱정하면서 말하기를 『내 생전에 이 따위 일을 보고 싶지 않다.』고 했다.」 한다.’ 하였습니다. > 인조실록 인조 10년(1632) 10월 16일 기사 [[인조반정]] 이후 [[광해군]]에게 제거된 [[임해군]]을 복권시키는 조치가 따랐다. 이 때 후사가 없던 임해군의 [[양자(가족)|양자]]로 [[선조(조선)|선조]]의 서9남이자 [[정원군]]의 [[이복동생]] [[경창군]]의 아들 [[양녕군|양녕군(陽寧君)]]을 입적시켰다. 1610년(광해군 2년)에 열린 경창군의 혼례를 [[정원군]]이 맡아 주관했고 [[인조반정]] 후 치루어진 [[소현세자]](당시 원자)의 관례는 경창군이 주관했을 정도로 두 집안이 가까워서 신경써준다고 한 조치였는데 임해군이 선조의 맏이라서 졸지에 왕위 계승서열까지 높아지는 바람에 역모에 연루된 것 이었다. 이 사건의 심각한 점은 '''폐모살제라는 인조 즉위 명분을 통째로 뒤흔들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인조의 조카가 사건에 연루되어 있었는데 만약 이 사건이 커져서 친척아우 [[양녕군]]이나 숙부 [[경창군]]이 화를 입는다면 인조는 [[영창대군]]을 죽인 광해군과 다를 바 없어진다. 폐모살제에 찬동한 죄로 [[인조반정]] 직후부터 지속적으로 공격받고 1628년(인조 6년) [[북인]]의 역모에 연루된 [[숙부]] [[인성군]]을 어떻게든 살려주려 노력하다 실패한 인조에게 스스로 이 사건을 키운다는건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두번째는 [[인목왕후]]가 이 역모에 연루되었다는 점이다. 폐모살제를 명분으로 수립된 인조 정권에서 [[대비]]의 위치는 인조의 왕통을 보증하는 캐스팅 보트였다. 만약 인목왕후가 인조를 제거하려는 모반 사건에 연루되었다면, 그것은 인조의 왕통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일이 된다. '''인목왕후의 사위, 그러니까 [[정명공주]]의 남편 홍주원의 삼촌''' 홍집도 이 사건에 연루되어 있었다.(임해군과 홍집은 본래 옆집 이웃이었다.) 대비가 살아있어서 열심히 부인해줬으면 차라리 나았을 텐데 '''하필 또 죽고 나서 터지는 바람에''' 부정도 못하니 더 골치아팠다. [[인조]] 입장에서 이 역모는 설사 사실이라도 사실이 아니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대비가 자신의 왕위계승을 부정했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 되니까.''' 인조는 고변 접수 일주일만에 [[사건]]을 사실무근으로 결론짓고 종결시켰다. 하지만 '''상례 중인 궁중에서 인목왕후의 저주문'''이 발견되어 사건이 더 심각해졌다.[* 인조실록 인조 10년(1632) 10월 23일 기사] 국왕 교체를 희망하는 내용이 담겨 있는 저주문이었는데 앞서 역모에 연루된 홍집을 문초했을 때 [[인목왕후]]가 저주로 국왕 교체를 논의했다는 진술이 있어서 더 심각했다. 인목왕후가 광해군에 의해 유폐되어 있을때 쓴 글이라는 말도 나왔으나 어차피 죽은 마당이라 진위 여부를 가릴 수가 없었다. ~~저주문에 날짜가 없었나 보다~~ [[인조]]는 국청을 설치하여 그 내용을 조사하도록 하였고, 땅에 묻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저주물을 찾는 작업도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인목왕후]]를 모시던 [[궁녀]] 여럿이 추국을 받고 고문사하거나 [[처형]]되었고, 인목왕후의 딸 [[정명공주]]는 인조 시절은 물론 [[효종(조선)|효종]]과 [[현종(조선)|현종]] 때까지 끊임없이 의심의 눈길을 받으며 불안 속에 살아야했다. 그런데 이 때 하필 또 '''이때 인조의 몸이 안 좋았다.''' 인조는 그게 어떻게 저주 때문이겠냐고 했지만 신하들의 강권도 있고, 저주문이 발견된 [[경희궁|경덕궁]]에 계속 있기엔 정치적 부담이 너무 커서[* 경덕궁에서 사건이 터졌는데 경덕궁에 왕이 계속 머무르면 입방아에 자꾸 오르내릴 수 있다.]궁궐을 옮기기로 하였다. 그런데 [[창덕궁]]과 [[창경궁]]은 없고, 별궁으로 눈을 돌리니 [[남별궁]]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인목왕후]]의 혼전이 있었다. 그래서 과거 스스로 좁다고 마뜩찮아 했던 [[이현궁]]으로 옮겨갔다. 병세한 위중한 [[인목왕후]]를 그 무더운 여름에 굳이 모시고 인경궁으로 건너갔다가, 인목왕후가 죽자마자 다시 [[경희궁|경덕궁]]으로 옮겨와 그것에 빈전을 차린 기묘한 행동은 6월에 이미 사건의 낌새가 있어 잠시 옮겨갔다 의혹을 이를 희석시키고자 이뤄진 행동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끝내 사건이 커지면서 수습이 불가능해져 인경궁도 경덕궁을 놔두고 뜨게 된 것이다. 인조가 이미지가 안좋아서 저 사건을 인조의 자작극으로 보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전술한 내용들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말도 안되는 소리다.'''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써가며 인경궁을 어떻게든 활용하려 애쓰고, 사건이 터진 다음에도 인경궁을 완전히 없애지 않으려 했던 사람이 조카와 [[대비]]를 끌어들여 자신의 즉위 명분 자체를 위협할 수도 있는 옥사를 조작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된다.''' 인조에게 [[인목왕후]]는 '''아무리 싫어도 그런 역모에 끌어들여서는 절대 안되는 사람'''이었고 고변도 일주일 만에 묻어버리려 했다. 인조는 [[경희궁|경덕궁]]을 나와 [[이현궁]]에 머물다가 10여 일만에 다시 [[창덕궁]]으로 옮겼다. 정식 궁궐이 아닌 이현궁의 성격상 장기 체류는 당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제반시설도 문제지만 왕이 이런 곳에 장기간 머물면 민폐가 장난이 아니었다. 그래서 부담이 없는 [[창덕궁]]으로 옮겨갔는데 당시 창덕궁은 [[인조반정]] 때 무사했던 인정전에, 1628년(인조 6년)에 그거 하나만 수리해놓은 [[창덕궁 돈화문|돈화문]], 이현궁에 머문 10여 일간 긴급 수리한 전각 몇 개가 전부였다. 인조는 민가와 거리가 있는 창경궁 터로 궁궐 인력을 보내 창덕궁의 부족한 수용 능력을 보완하고 민폐를 줄이려 했다. 이때부터 인조는 '''인경궁에 관심이 줄고 창덕궁과 창경궁에 신경을 썼다.''' [[광해군]]의 난정을 명분삼아 [[인조반정|반정]]을 일으켜 즉위한 임금인데 재위 10년차에 갑자기 명분에 치명타가 될 수 있는 역모 사건이 터졌다.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의 승계를 인정한 왕실 어른 [[인목왕후]]가 연루된 사건이었다. 자연히 세월이 지나며 덜해진 광해군 시절 폐정에 대한 부담이 확 커졌으므로, 확실하게 광해군 시절과 결별한다는 [[제스처]]를 강하게 보일 필요가 있었다. 인조는 [[경희궁|경덕궁]]과 인경궁으로 옮겨가는 대신 임시 수리한 [[창덕궁]]에 머물며 창덕궁보다 손상이 덜했던 [[창경궁]]을 다시 세우려 했다. 창경궁은 반정 직후 [[이괄의 난]] 이전까지 인조가 정사를 돌본 궁으로 광해군의 궁궐 영건을 폐정으로 규정하였던 반정의 명분을 다시 한번 강조하는데 적합했다. 그리고 완전히 허허벌판이 된 창덕궁과 달리 [[창경궁 명정전|명정전]], [[창경궁 문정전|문정전]], 여휘당, [[창경궁 환취정|환취정]] 등 상당수 전각이 남아있었다. 신하들은 공역에는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나 그렇다고 저주사건 터진 경덕궁이나 자신들이 내내 폐정의 상징이라며 깠던 인경궁으로 가자는 말도 선뜻 할 수 없었다. 인조는 전면 중수 대신 다른 궁궐에서 일부 전각을 옮겨와 공역 부담을 최대한 덜어주는 절충안을 제시했다. 다른 궁궐을 헐어야 한다면 경덕궁과 인경궁 중에선 당연히 인경궁이었다. 이쪽이 원래 광해군대 지독했던 영건 사업의 상징이었으니까. 조정 여론은 이에 동조하는 의견과 그냥 인경궁 쓰자는 의견으로 갈라졌다. 다만 그냥 '''인경궁 쓰자는 의견도 인경궁을 계속 쓰자는 의견이 아니었다.''' 법궁(창덕궁, 창경궁)은 전각을 옮겨서 짓는게 아니라 새로 증건하는게 맞는데 나라 안팎으로 시급한 사안이 많으니 인경궁을 임시로 쓰자는 의견이었다.[* 인조실록 인조 11년(1633) 3월 28일 기사에 실린 김상용의 주장.] 이러한 요청에 대해 인조는 일견 수긍하면서도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인경궁 이어와 창덕궁 중건의 방안을 두고 전개된 논의는 인조의 뜻에 따라 창경궁 중수로 귀착되었다. 다만 인조도 인경궁 자체를 없애버리려는 생각은 없어서 대내 전각을 덜어내자는 의견을 각하하고 인경궁 전각 철거와 이전을 하나도 빠짐없이 자신의 재가를 받도록 했다. 1633년(인조 11년)) 3월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창경궁]] [[공사]]는 같은 해 6월 마무리 단계에 들어서 7월 26일 [[인조]]는 창경궁으로 옮겨갔다. 그리하여 [[병자호란]] 이전까지 창경궁에 머물렀다. 요약하면 [[인조]] 시절의 궁궐 경영은 반정 초기 [[창경궁]]이었고 [[이괄의 난]]을 계기로 [[경희궁|경덕궁]]이 되었다가 재위 4년차부터 조금씩 인경궁에 관심을 두어 [[경희궁]]-[[인경궁]] 두 궐을 하나처럼 쓰는 체제가 굳어지나 싶었지만, 1632년(인조 10년) [[인목왕후]]가 연루된 역모 고변이 터지면서 급변한 정계 사정으로 무너지고 다시 [[창경궁]]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인경궁은 사라졌다. 인경궁의 건물은 대부분 창덕궁과 창경궁의 전각이 되었다. 그리고 1648년(인조 26년)에 [[청나라]]의 요구로 홍제원에 역참을 지을 때 일부가 자재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이 때 창덕궁, 창경궁으로 이건(移建)된 건물들은 [[순조]] 시절의 창덕궁 대화재 등을 거치며 대부분 소실되었다. 그러나 딱 하나 현재까지 그 때 모습대로 남아있는 전각이 있다. 바로 [[창덕궁 선정전]]이 된 편전 광정전이다. 현재 선정전이 궁궐 건물들 중 유일하게 청기와 지붕인 이유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