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인도/역사 (문단 편집) == 지방 왕조들의 성립과 [[힌두교]]의 성장(550년 ~ 1206) == [include(틀:양서)] [include(틀:위서(북조))] [include(틀:남사)] [include(틀:구당서)] [include(틀:신당서)] 굽타 왕조의 붕괴 이후, 인도에서는 [[유럽]]처럼 중소 국가들의 투쟁사가 전개된다. 이 시기부터 무굴제국의 등장까지를 흔히 인도사의 [[중세]]로 본다. 북방에서는 [[바르다나 왕조]] 이후 구자라트계 왕조([[프라티하라 왕조]]가 대표적 - 740–1018), [[팔라 왕조]](750–1174) 양대왕조가 흥성하였고, 데칸 고원의 [[라슈트라쿠타 왕조]](753–982)와 8~10세기에 걸쳐 [[카나우지]]에서 삼각 구도를 이루었다. (이 중 프라티하라 왕조는 미히라 보자와 마헨드라팔라의 재위를 거치면서 북인도의 강대국으로 급부상했고, 300년 동안 이슬람의 인도 침입을 저지한 북인도의 방파제 역할을 했다. 비잔티움 제국이나 프랑크 왕국이 이슬람의 유럽 침공을 저지한 것과는 달리 이쪽은 일반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시기에는 남방 지역이 성장하기 시작하여, 힌두 왕국인 [[팔라바 왕국]](3 ~ 9세기), '''[[촐라 왕국]]'''[* 남인도 왕조로서 유일하게 갠지스강까지 진출했다.](9 ~ 13세기), [[찰루키아 왕국]](6 ~ 13세기, 중간에 동찰루키아 - 서찰루키아가 갈라지는 역사를 포함), [[비자야나가르 왕국]](14 ~ 17세기) 등이 동남아시아 및 이슬람권과 교역을 활발히 해나갔다. 또한 굽타 왕조가 국가 재정비를 위해 불교 대신 계급 위주의 힌두교를 후원한 이래 불교는 급속히 쇠퇴하여 갔으나, 8 ~ 9세기경까지 [[당(통일왕조)|당]]을 비롯한 동아시아 불교계와 직접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을 보면 이러한 불교의 쇠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왕'''오'''천축국전이라는 제목에서도 5개의 국가로 분열되어 있던 인도의 세태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러나 10세기 이후 하층민들은 신분제의 틀이 엄격했던 힌두교 대신 평등 사상이 담긴 이슬람교를 많이 택했는데, 이 때문에 평등 사상에 힘입어 세력을 이어가던 불교는 다시 한 번 치명타를 입게 된다. 당시 인도의 불교계는 상좌부/대승 불교로의 분열 이후 수많은 부파로 갈라져 이들 간의 소모적인 교학 논쟁에 집중되어 대중에 대한 관심이 많이 약해지고 오랫동안 주류 위치를 차지하면서 평등 사상이 많이 약해진 상태였는 데다가 힌두교를 흡수하기 위해 신격과 주술, 의례를 받아들여 불교화한 밀교가 등장한 상태였는데 이 밀교가 이슬람이 유입되는 상황에서 되려 역효과를 가져왔다. 이에 힘입어 이 시기는 샹카라, 라마누자 등 뛰어난 힌두교 이론가들이 등장한 시기이기도 하다. 이들은 불교 철학을 논박하며 특히 아트만(자아, '나')과 브라흐만(우주와 그 통일적 질서)의 일체화(범아일여)를 중시하였으며, 베단타 학파를 융성하게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