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인도네시아/역사 (문단 편집) ==== 발리: 고대와 중세 ==== 고고학 발굴에 따르면 발리섬에서는 일찍이 8세기에 불교 유물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10세기부터 사일렌드라의 방계인 대승불교계 와르마데와 왕조(Wangsa Warmadewa, 914–1181)가 발리를 통치하며 여러 비문을 남겼다. 자바 동부의 [[마타람 왕국]], 카후리판 왕국, [[싱하사리 왕국]]도 발리의 정치에 간섭하였다. 자바와 발리 왕족 간 통혼이나, 자바 군주의 친척이 발리의 왕위에 오르는 경우도 많았다. 이 시기의 비문 가운데 와르마데와 왕조의 초대 왕으로 간주되는 스리 크사리(Sri Kesari Warmadewa)가 914년에 세운 블란종 비문(Prasasti Belanjong)이 특히 역사적 중요성이 높다. 이 비문은 발굴 당시 많이 훼손되기는 했지만, 10세기 당대 발리의 지명들과 군주의 군사 원정, 그리고 10세기 초 당대 발리 왕의 왕궁에 대해 언급한다. 이 비문에서는 또한 발리섬을 뜻하는 고풍스러운 명칭 '발리 드위파'(Bali Dwipa, 비문의 표기는 왈리 드위파[Vāli-dvīpa])가 오늘날 확인 가능한 발리계 문헌 가운데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와르마데와 시대 발리의 수도는 오늘날 기아냐르(Gianyar) 인근의 브둘루(Bedulu, 또는 브다훌루Bedahulu)였으며, 고고학 조사에 따라 이 지역에서는 부조와 목욕장 등의 보존 상태가 좋은 11세기 석굴 사원 고아 가자(Goa Gajah) 등의 유적과 다양한 유물이 발굴되었다. 역시 11세기 무렵에 건축된 사무안 티가 사원(Pura Samuan Tiga)도 지역에서 성스러운 사원으로 오늘날까지도 기능하고 있다. 13세기 이전 발리의 고대사는 다양한 발리와 자바의 연대기와 비문으로 기록되어 있기는 하지만, 문헌의 신뢰성을 보장하기 힘든 경우도 많다. 14세기 자바 문헌 《[[나가라크르타가마]]》(1365)에 따르면, 싱하사리의 크르타나가라 왕은 1284년 발리로 원정군을 보내 발리 여왕의 군대를 무찌르고 여왕을 붙잡아 자신 앞으로 데려왔다고 한다. 그러나 싱하사리가 1290년대 내부 반란으로 혼란해지자, 발리는 잠시 자바의 간섭에서 자유로워졌다. 1343년, 발리는 강력한 팽창주의적 신흥 세력 마자파힛 제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였고, 뒤이어 마자파힛의 대재상 가자 마다는 발리를 복속시키기 위해 [[삼프랑안]](Samprangan)을 지방 수도로 삼고 크파키산(Sri Aji Kresna Kepakisan)을 지방 영주로 파견하였다(1352). 크파키산은 발리를 안정화하고 섬 전역에 마자파힛의 권위를 확립하였다. 이를 기점으로 발리의 역사는 마자파힛 치하에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나가라크르타가마》에도 발리의 정복 연도인 1343년을 비롯해 발리에 대한 언급이 있기는 하지만, 여기서 크파키산에 관한 기록의 출처는 기본적으로 발리 측 기록인 《바밧 달름》(Babad Dalem)이다. 이 외에도 수많은 전승과 후대의 기록이 있으며 발리의 왕가는 마자파힛 정복 이후 크파키산을 선조로 인정하고 권위의 근원을 그에게서 찾았지만, 사실 크파키산에 대한 기록은 상당 부분이 신화적이거나 인위적이다. 가령 《바밧 달름》에 따르면 크파키산의 어머니는 [[압사라스]]였다고 하며, 크파키산의 두 형은 각각 자바 동부 블람방안과 파수루안(Pasuruan)의 영주였다고 한다. 1471년 기록되어 발리에서 발굴된 비문에 크파키산과 동일시되는 '마자파힛에서 온 왕 파키산'(Pakisan)에 대한 언급이 있으나, 이 비문의 연도에 대해서는 후대의 조작이라는 설이 있다. 17세기 초에 포르투갈인 마누엘 고디뉴 드이레디아(Manuel Godinho de Erédia)가 남긴 기록에서는 당시 크파키산의 후계자로서 권위를 주장하던 겔겔의 왕가는 자바 동부 블람방안 왕국 왕가의 후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마자파힛 제국 말기 내전과 이슬람계 세력의 공격으로 제국이 약화되던 1478년에는 내전에서 패퇴한 마자파힛 고위 귀족들이 대규모로 발리로 피신하기도 했다. 이때부터 자바의 이슬람화가 완성되기 전까지 자바의 힌두교도, 불교도 귀족들은 계속해서 발리로 도피했다. 이와 같은 자바에서의 대규모 이민은 오늘날까지도 발리인의 정체성에 큰 영향을 남겼다. 마자파힛 말기 이민자들이 도착한 남부 지방에서는 거의 대부분의 주민들이 스스로를 마자파힛의 후예(Wong Majapahit)로 여긴다. 발리는 마자파힛 귀족들이 가져온 힌두–불교 기반 자바 문화에 큰 영향을 받았고 [[발리어]]도 [[자바어]]를 모델로 크게 발전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