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인도네시아/역사 (문단 편집) ==== 발리/롬복: 네덜란드의 정복 ==== {{{#!wiki style="float:center;text-align:center" [[파일:800px-Puputan_of_the_Raja_of_Boeleleng.jpg|width=350]][br]불렐렝 라자의 자결([[푸푸탄]]), 1849년의 《프티 주르날》(Le Petit Journal) 삽화}}} 네덜란드는 자바와 수마트라 경략에 집중하느라 발리에 기울일 여력이 없었다가, 자바와 수마트라의 지배체제가 거의 완성된 19세기 중반부터는 본격적으로 발리 왕국들의 내정에 간섭하기 시작했다. 7차례의 원정(1846–1908)을 거쳐 발리 왕국들은 네덜란드의 보호국이 되어 네덜란드령 동인도에 속하게 되었다. 최초로 네덜란드의 표적이 된 것은 역설적으로 타 군도 지역의 유력 항구에 견줄 만한 유일한 발리의 무역항인 [[싱아라자]](Singaraja)를 소유하고 화인, 자바인, 부기스인 등과 적극적 상업 교류를 지속했던[* 기타 소왕국도 화인, 자바인, 부기스인 상인과 남부 해안의 소규모 항구에서 교역했지만, 적어도 그 교역량이 19세기 중반까지 싱아라자만큼은 아니었다.], 발리에서 가장 개방적인 왕국 불렐렝이었다. 1846년, 발리의 해안으로 밀려간 난파선이 약탈된 사건으로 네덜란드가 포함을 앞세워 북부 해안의 불렐렝을 침공하고 교역항 싱아라자를 점령, 왕궁을 파괴한 후 불렐렝에 불리한 협정을 맺고 돌아갔다. 그러나 이를 치욕으로 여긴 불렐렝의 실권자인 재상 즐란틱(I Gusti Ketut Jelantik)은 협정 이행을 거부하고 불렐렝인들을 규합하여 항전 태세를 취했다. 이에 네덜란드는 1848년 다시 한 번 불렐렝을 침공하였지만 불렐렝군에 패퇴하고 돌아간다. 그러자 네덜란드는 아예 불렐렝을 지배하에 두고자 1849년 본격적인 원정을 개시하였다. 격렬한 전투 끝에 불렐렝은 패퇴하였고, 싱아라자는 점령되어 네덜란드령이 되었으며, 이 과정에 자가라가(Jagaraga)에서 수많은 불렐렝인(즐란틱의 부인도 포함)은 진격하는 네덜란드군 앞에서 숭고한 자살 의식으로 품위를 유지하며 죽었는데 이것이 네덜란드에 대한 최초의 [[푸푸탄]](Puputan)이었다. 즐란틱과 불렐렝의 왕은 불렐렝의 동맹 카랑아슴 왕국으로 도피하여 반네덜란드 세력을 규합하고자 하였다. 네덜란드는 이에 대항해 카랑아슴의 숙적인 [[롬복섬]]의 마타람 왕국을 동맹으로 끌어들여, 카랑아슴을 겨냥해 발리 남해안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네덜란드 선박을 타고 발리로 이동한 롬복군은 카랑아슴–불렐렝 세력을 기습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즐란틱과 불렐렝 왕, 카랑아슴의 왕은 이 과정에 사망하였고, 일부는 마찬가지로 의식적인 집단 자살(푸푸탄)로 목숨을 끊었다. 연속된 승리에 고무되어 네덜란드는 내친김에 발리 전체를 복속시킬 요량으로 발리의 명목상 수도인 클룽쿵으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클룽쿵의 카냐 여왕(Dewa Agung Istri Kanya)은 쿠삼바(Kusamba)에서 야습으로 네덜란드군 지휘관 안드레아스 빅토르 미힐스(Andreas Victor Michiels)[* 《[[막스 하벨라르]]》의 등장인물 판다머 장군(generaal Vandamme)의 실제 모델이기도 하다.]를 사살하는 승리를 거두었고, 네덜란드군 잔당은 클룽쿵과 클룽쿵에 호응하는 바둥, 기아냐르, 타바난 세력의 3만 3천에 달하는 연합군에 쫓겨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 시점에 바둥의 왕과 남부 쿠타(Kuta) 지역에서 토착 세력에 고용되어 교역을 담당하던 덴마크인 [[마스 랑에]](Mads Johansen Lange)가 네덜란드와 클룽쿵 간에 중재자로 개입하여, 1849년 7월에 불렐렝과 즘브라나 지역을 네덜란드가 지배하고 롬복 세력이 카랑아슴을 지배하는 것을 핵심으로 한 조약이 체결되었다. 네덜란드는 싱아라자에 발리 최초의 영구적인 네덜란드 정청을 설치하였으며, 1855년부터 네덜란드 지방 총독은 불렐렝과 즘브라나의 토착세력 위에 공식적으로 군림했다. 1891년, 롬복섬 동부의 무슬림 [[사삭인]]이 마타람을 거점으로 하는 발리계 구 지배층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 사삭인은 19세기 중반의 발리 침공 시기와 그 이후에 마타람의 물자, 인력 징발에 반발하여 간헐적으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모두 진압당했던 적이 있었다. 이번 반란에서도 근대 무기를 갖춘 마타람의 진압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나 싶었지만, 전쟁은 1894년까지 이어졌고, 사삭 반란군은 불리함을 타개하고자 1894년 2월 20일 네덜란드에 지원을 요청했다. 롬복에서의 세력 확장을 노리던 네덜란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고, 1894년 7월부터 11월까지의 롬복 원정을 통해 마타람 세력을 제압, 롬복 및 그 속령인 카랑아슴을 지배하게 되었다. 전쟁 말기인 11월에는 롬복의 마타람 측에서도 푸푸탄을 거행하였다. 롬복의 압도적인 패배를 목격한 발리의 방리와 기아냐르도 곧 네덜란드의 종주권을 인정함으로써, 9개 소왕국 중 네덜란드에 반항하는 세력은 이제 3개(클룽쿵, 바둥, 타바난)뿐이었다. 9왕국 중 믕위 왕국은 부기스 용병 소총대를 앞세운 1891년 바둥–타바난 연합군의 원정으로 이미 멸망한 상태였다. 1904년 초, 네덜란드는 타바난 왕국에 [[사티]] 관습의 철폐를 요청하였으나 타바난의 왕은 이를 거절하였다. 1904년 5월 27일, 화인 [[스쿠너]]선 스리쿠말라(Sri Kumala)호가 난파하여 바둥의 수도 [[덴파사르]] 동쪽 인근의 사누르(Sanur) 해안에 도달하였는데 바둥인들이 이 배를 약탈하였다. 네덜란드는 배상을 요구하였으나 바둥의 왕은 난파선의 소유권 양도에 관한 발리의 관습 타완 카랑(tawan karang)에 의거해 이를 거부하였고, 네덜란드와 불편한 관계였던 클룽쿵과 타바난 역시 바둥을 지지하였다. 19세기 중반에 네덜란드가 처음 침공했을 때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결국 네덜란드는 이 약탈 사건을 구실로 1906년 6월, 남부 해안 봉쇄를 시작하고 네덜란드에 반항하는 세 왕국에 최후통첩을 보냈으며, 1906년 9월 14일 네덜란드 원정대가 사누르 해안에 상륙했다. 바둥군은 저항하였으나 중과부적이었고, 네덜란드군은 수월하게 내륙으로 진격하였다. 네덜란드군은 마침내 바둥의 수도 덴파사르에 당도하였다. 덴파사르의 바둥 궁전으로 들어간 네덜란드군은 바둥의 라자가 흰 옷을 입고 가마꾼 4명이 이는 가마에 올라 앉아, 마찬가지로 흰 옷을 착용한 신하들과 함께 조용한 장례 의식을 거행하며 행진하는 모습을 목격하였다. 네덜란드군이 라자의 행렬에서 100보쯤 되는 위치에 이르자, 라자는 가마에서 내려왔다. 라자를 수행하던 브라만 사제가 검을 라자의 가슴에 찔러 넣었으며, 뒤이어 동시에 수많은 신하들이 집단으로 자살하기 시작하였다. 당황한 네덜란드군은 발포하였으며, 라자의 행렬은 전멸하고 네덜란드군이 궁성을 약탈, 파괴하였다. 이것이 많은 기록이 남아 있는 바둥의 푸푸탄이었으며, 이로써 바둥은 멸망하였다. 타바난 역시 네덜란드군에 항복하였고, 타바난의 지배계급은 바둥만큼 극적이지는 않았으나 수용소에서 푸푸탄을 거행하였다. 네덜란드는 클룽쿵으로도 진격하려 했지만, 클룽쿵의 라자는 자신의 요새를 파괴하고 자발적으로 항전을 종료하였다. 1908년, 발리에서 [[아편]] 생산을 독점하려는 네덜란드의 시도에 반발해 카랑아슴의 라자가 반란을 일으켰고, 클룽쿵과 방리의 라자도 합세하였다. 반란군은 자바인 아편 거래 중개인을 참살하고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였다. 네덜란드는 신속하게 진압군을 보냈고, 반란군을 분쇄하고 발리의 수도 클룽쿵을 포격하였다. 1908년 4월 18일, 클룽쿵의 라자, 데와 아궁 잠베 2세(Dewa Agung Jambe II, 재위 1903–1908)는 수행원 2백 명 및 부인 6명과 함께 흰 옷을 입고 전설적인 단검을 들고 절망적으로 네덜란드군을 향해 돌격했다. 라자는 예언에 따라 이렇게 기습적으로 돌격하여 네덜란드군에 혼란을 안기면 네덜란드군이 물러갈 것이라고 믿었으나, 네덜란드군이 발포하자 라자는 총에 맞아 쓰러졌다. 마지막 희망은 물거품이 되었고, 곧이어 여섯 왕비와 신하들은 들고 온 단검으로 푸푸탄을 수행하였다. 네덜란드군은 마찬가지로 약탈 후 클룽쿵 궁성을 불태웠다. 클룽쿵의 저항 세력이 이렇게 소멸하자, 1908년 10월 방리와 카랑아슴은 항복하고 순순히 네덜란드의 보호국이 되었다. 이로써 네덜란드의 발리 원정은 종결되었다. 그러나 1906년과 1908년 발리 원정 전후에는 네덜란드의 비도덕적인 침략 행위와 무자비한 약탈 및 파괴가 [[신문]] 등의 대중매체로 서구 세계에 널리 알려져 네덜란드 식민 정책이 크나큰 비판에 직면했다. 이는 네덜란드가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 [[윤리정책]](Ethische Politiek, 1901–1942)을 강화하는 데 직접적인 계기로 한 몫 하였다. 네덜란드 식민 당국은 윤리정책 하에서 발리 전통의 보호자를 자처하였고, 발리를 전통 문화의 박물관이자 흥미로운 관광 명소로 선전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