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인도네시아/역사 (문단 편집) == 초기 역사 == 고고학과 신화의 시대를 지나 인도네시아가 역사 시대로 진입한 것은 서기 4세기이다. 인도네시아 군도 지역의 [[문자]] 기록은 토착 국가들이 서기 2~4세기경 [[인도]]에서 온 상인들과의 교류를 통해 [[인도화]]되고, 인도의 종교, 문화를 받아들여 인도의 문자를 차용해 남긴 비문에서 시작된다. 이러한 비문들을 남긴 최초의 국가로는 서부 자바 지역의 [[타루마 왕국]](Tarumanagara, 358~7세기 후반, 타루마나가라 왕국[* 여기서 'nagara'라는 말 자체가 '나라'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으므로 엄밀히 말해 '타루마나가라 왕국'이라는 표현은 의미 중복이다. 그러나 관용적으로 '타루마나가라 왕국'이라는 표현도 한국어 및 영어 자료에서 종종 쓰이고 있으므로 기재한다.])과 동부 [[보르네오 섬|칼리만탄]] 지역의 [[인도네시아/역사#쿠타이 왕국|쿠타이 왕국]](Kutai Martadipura, 4~5세기경)이 있었다. 이들 지역의 고대 비문은 남인도의 [[팔라와 문자]]로 된 [[산스크리트어]]로 적혀 있었다. 타루마 왕국 성립 전에 서부 자바 지역에는 오늘날의 [[반튼]] 지역을 중심으로 한 [[살라카 왕국]](Salakanagara, 130~362, 살라카나가라 왕국)이 있었다고 후대 자바 지역의 연대기에 전해지지만, 아직 이 시대의 기록이 발견된 적은 없으며, 남아 있는 기록에도 간략한 창건 과정과 왕들의 계보 정도밖에는 적혀 있지 않다. 수마트라섬에는 서기 3세기 중국 [[오나라]]의 기록 《남주이물지》(南州異物志) 등에 따르면 3세기에 가영(歌營[* 《남주이물지》를 인용한 후대 문헌 《태평어람》(太平御覽, 984)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南州異物志》曰:'''歌營國'''在句稚南,可一月行到,其南文灣中有洲名蒲類,上有居人,皆黑如漆,齒正白,眼赤,男女皆裸形。" 여기서 "句稚"도 동시대 지명으로, 일반적으로 [[말레이 반도]] 북동부에 있는, 당대 [[부남]]의 영향권에 있던 항구로 본다.], Koying[* (Wolters 1967)에서 이를 지적한 이후 영어권 및 마인어권에서 'Koying'이라는 현대 중국음에 가까운 표기가 정착되었다. '歌營'은 [[한어병음]]을 따를 시 'Gēyíng'으로 표기되며, [[웨이드-자일스 표기법]]에 따르면 'Ko¹-ying²'으로 표기되는데, 'Koying'은 후자에 기반한 듯하다. 그러나 [[중고한어|중고음]]에 따르면 이는 'ko-ying'보다는 'ka-yweng' 정도일 것이며, 올리버 월터스 본인도 (Wolters 2008, "Studying Srivijaya")에서 3세기 당대 현지음이 'Kawang'이었을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특히 여기서는 가영국의 위치가 자바 서부였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이라는 말레이 국가가 중부 [[잠비]] 지역에[* 일반적으로 가영국은 수마트라 동부에 있었을 것으로 보지만, 앞서 언급한 월터스처럼 가영국의 위치가 자바 서부였을 것으로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있었다고 하지만 기록이 적고 간단하며, 당대 사료가 수마트라에서 발견되는 식으로 확실히 입증되지는 않고 있다. 5세기 중반에는 중부 잠비 지역에 [[칸달리 왕국]](Kandali, 간타리干陀利)이라는 국가가 존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서도 역시 중국 측 기록만 남아 있으나, 이 국가는 [[유송]]에 454~464년 사이 사신을 보냈고, 519년에도 중국에 사신을 보냈으며 이에 대한 전후 관계가 비교적 명확한 복수의 관련 중국 사료가 존재하여[* 《책부원귀》(册府元龜, 1013) 권968, 《통지》(通志, 1168) 권196, 《송회요집고》(宋會要輯稿) 권197, 《문헌통고》(文獻通考, 1317) 권338 등.] 실존 국가로 추정된다. 이 외에도 6~7세기 북부 수마트라에 나구르(Nagur)[* 투안쿠 라오(Tuanku Rao)의 설에 따르면 고대 바탁인의 왕국으로서 5세기~12세기에 존속했다고 하며, '나구르'라는 지명은 [[마르코 폴로]]의 13세기 기록이나 [[정화]] 함대의 15세기 기록을 비롯하여 15, 16세기 외국 관찰자의 기록에 여러 번 등장했다. 중국식 명칭은 나고아(那孤兒 / 那姑兒).], 남부 수마트라에 툴랑바왕(Tulang Bawang)[* 7세기 [[당나라]] 승려 의정(義淨)의 기록에 등장한다.] 등의 국가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 실체는 불확실하다. 수마트라섬 전체에서 발견된 최초의 문헌기록은 682년경 [[팔렘방]] 부근에서 기록되어 1920년에 발굴된 [[크두칸부킷 비문]]이다. 이 석문은 [[팔라와 문자]]로 된 고대 [[말레이어]]로 쓰여 있었으며, 여기에는 스리위자야 왕국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 있었다. 보르네오/칼리만탄 지역은 4~5세기의 쿠타이 왕국 이후 자바, [[중국]], [[인도]]의 저술가가 해안 지역의 교역소를 묘사한 기록이 극소수[* 《태평환우기》(太平環宇記, 10세기 송나라 지리서)에서는 보르네오 지역을 '발니'(渤泥)라고 언급했다. [[남송]]의 관료 조여괄(趙汝适)은 《제번지》(諸蕃志, 1225)에서 발니에 대해 비교적 상세한 기록을 남겼는데, 특히 당대 발니의 풍요로움을 설명한 부분이 인상적이며, "성 안에는 10,000여 명이 거주하며, 14개 주를 다스린다. 군선 100여 척을 부린다." 등 당시 발니 세력의 규모도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371년 중국인 관찰자는 "발니는 가난하며 마자파힛이 지역을 완전히 통제하고 있다."라고 기록했다.] 있기는 하나, 한동안 역사 기록의 공백으로 남아 있었다가 14세기 자바 문헌 《[[나가라크르타가마]]》(1365)에서 마자파힛의 속령으로 재등장하게 된다.[* 《나가라크르타가마》 및 후대의 자바 역사서 《파라라톤》에서는 대략 오늘날의 보르네오 서부 크타팡(Ketapang) 지역에 '탄중푸라'(Tanjungpura)라는 왕국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나가라크르타가마》에 따르면 13세기 싱하사리 시대에는 자바에서 '바쿨라푸라'(Bakulapura)로 불렸으며 싱하사리의 종주권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탄중푸라 왕의 계보는 15세기 중반부터 자바, 남보르네오, 남술라웨시 등의 기록으로 확인되는데, 탄중푸라 왕국이 13세기의 자바 지배기 전에도 존재하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고, 간혹 10세기까지 구전 전승 등에 의존하여(가령 해당 지역의 구전 전승에 따르면 977~1025년 재위한 '시악 바훌룬'(Siak Bahulun)이라는 왕이 있었다고 함) 탄중푸라 왕의 계보를 올려잡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 13세기 이전에 탄중푸라가 존재하였더라도, 그 국가 체제가 어느 정도의 틀을 갖추었고 사회나 경제가 어떠하였는지 등은 증거 부족으로 알 수 없다.]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사라왁강]] 삼각주 지역은 중국과 인도를 잇는 중계무역 경유지로서 약 6세기부터 1300년 전후까지 번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마자파힛이 지방 통제력을 상실하면서 [[브루나이 술탄국]](1368–1888) 등이 마자파힛 제국으로부터 독립하여 다시 독자적인 역사를 시작하게 된다. [[술라웨시섬]]과 서뉴기니 일부 지역[* 정확히는 현재의 오닌 반도(Onin peninsula)]도 역사에 《[[나가라크르타가마]]》에 적힌 마자파힛의 속령으로 처음 등장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