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인도네시아/역사 (문단 편집) ==== 트르나테와 티도레 ==== {{{#!wiki style="float:center;text-align:center" [[파일:Peta-wilayah-uli-lima-dan-uli-siwa.jpg|width=400]][br]16세기의 트르나테 술탄국(Uli Lima)과 티도레 술탄국(Uli Siwa)}}} [[말루쿠 제도]]의 [[트르나테]]를 거점으로 서파푸아계의 [[트르나테어]]를 사용하는 트르나테인들이 가피 왕국(Kingdom of Gapi)을 건설한 것은 1257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첫 군주는 바브 마슈르 말라모(Baab Mashur Malamo)였다. 트르나테 및 인접한 [[티도레]] 지역은 세계적인 [[정향]] 생산지로서, 이 지역을 지배하고 무역으로 이득을 취한다면 엄청난 부를 얻을 수 있었다. 이 지역에 [[이슬람교]]는 15세기 후반에 [[자바섬]]에서 전파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가피의 17대 군주 마르훔(Marhum, 가피 바구나Baguna 2세) 시대에 왕가가 이슬람으로 개종하였고, 마르훔의 아들이자 18대 군주인 자이날 아비딘(Zainal Abidin, 재위 1486–1500)은 [[샤리아]] 법률 체계를 갖추고 본격적인 술탄국(트르나테 술탄국)으로의 전환을 선포하였다. 자이날 아비딘의 치세부터 가피의 군주를 칭하는 '콜라노'(Kolano, 왕)라는 칭호는 '[[술탄]]'으로 바뀌었다. 인접 지역인 티도레에도 15세기에 티도레 술탄국(1450–1904)이 등장하였다. [[포르투갈]] 탐험가 [[프란시스쿠 세항]](Francisco Serrão)이 16세기 초에 유럽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스람섬]](Seram) 근해에서 난파하여 트르나테 술탄국의 영역에 도달하였는데, 지역 주민들에게 구조되었다. 트르나테의 술탄 바야눌라(Bayanullah, 재위 1500–1522)는 포르투갈 세력이 강하다는 소식을 듣고 세항 일행을 트르나테로 데려와 환대하였으며, 트르나테섬 한켠에 포르투갈이 [[카스텔라 요새]](Benteng Kastela, [[포르투갈어]]로는 상주앙바티스타São João Batista, 1522년 착공, 1523년 완공)를 짓도록 허락하였다. 세항은 트르나테에서 1522년에 사망하였다. 이후 포르투갈 세력이 트르나테의 내정에 개입하며 트르나테를 [[가톨릭]]화하고자 노력하는데, 탐욕스럽고 포악한 행동으로 트르나테 지역에서 포르투갈인의 평판은 좋지 않았다. 1535년 내부 알력으로 퇴위한 술탄 타바리지(Tabariji, 재위 1533–1534)를 포르투갈인들이 [[고아(인도)|고아]]로 데려가 기독교로 개종시켰으며, 기독교인이 된 타바리지는 동마누엘(Dom Manuel)로 개명하였다. 나중에 축출이 부당하였음이 인정되어 동마누엘은 포르투갈의 도움으로 트르나테로 돌아가고자 하였지만, 귀향길에 포르투갈령 [[말라카]]에서 사망하였다(1545). 그러나 동마누엘의 트르나테 술탄국 내 영지인 [[암본섬]](Ambon)은 그의 의지로 포르투갈인 [[대부]] 조르당 드프레이타스(Jordão de Freitas)에게 넘겨졌다. 시간이 지나며 포르투갈의 간섭이 더욱 심해져 술탄 카이룬 자밀(Khairun Jamil, 재위 1535–1570)이 포르투갈에 의해 암살된 사건을 계기로 포르투갈인들은 트르나테섬에서 5년간의 전쟁을 거쳐 축출되었다(1575). 쫓겨난 포르투갈인들은 암본섬을 말루쿠 제도에서 포르투갈의 새로운 거점으로 삼았다. 카이룬을 계승한 새 술탄 바불라(Babullah Datu Shah, 재위 1570–1583)의 치세에 트르나테 술탄국은 군사적, 경제적 전성기를 맞아 [[술라웨시섬]] 동부, 암본섬, 스람섬, [[티모르섬]]뿐만 아니라 [[민다나오섬]] 남부, 서부 [[뉴기니]] 일부 지역까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바불라와 그의 아들 사이드 바라카트 샤(Said Barakat Shah, 재위 1583–1606)[* 마인어 외래어표기법을 준용할 경우 '사잇 바라캇 샤']의 시대에 트르나테에는 이슬람 강경파가 득세하고 반포르투갈 감정이 만연하였으며, 상대적으로 말루쿠 지역에서 포르투갈인의 세력은 위축되었다. 1605년이 되자 지역에서 포르투갈의 이권을 빼앗아올 기회만 노리던 [[네덜란드]]가 암본과 티도레에서 포르투갈 요새들을 점령하고 트르나테섬에 무역 거점을 세운다. 그런데 갑자기 1606년 [[스페인]]이 트르나테에 개입하여 트르나테섬의 카스텔라 요새를 점령, 1606년 술탄 사이드를 축출하고 그를 [[마닐라]]로 데려가는 사건이 벌어진다. 1607년 네덜란드가 트르나테를 도와 말라요(Malayo)에 요새를 짓고 군사적으로 트르나테를 원조하기 시작하여, 트르나테–네덜란드 연합과 티도레–스페인 연합 간에 오랜 반목이 시작된다. 네덜란드는 처음에 포르투갈과 달리 트르나테 내정에 심각하게 개입하지 않아 술탄의 환영을 받았다. 술탄 함자(Hamzah, 재위 1627–1648)의 치세에 트르나테 술탄국은 네덜란드의 도움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변경의 지배력을 공고히 하였다. 그러나 만다르 샤(Mandar Shah, 재위 1648–1650, 1655–1675)의 치세에 트르나테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도움을 준 대가로 트르나테는 일부 영토를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 양도하게 된다. 네덜란드의 세력은 더욱 강성해져 1663년에는 스페인이 말루쿠 제도에 개입하는 것을 완전히 포기하고 떠났다. 공동의 적이 사라지자 차츰 트르나테–네덜란드의 친선 관계에도 금이 가기 시작하여, 술탄 시보리(Sibori, 재위 1675–1689) 시대에는 술탄이 네덜란드 세력을 말루쿠 제도에서 축출하고자 전쟁을 선포하였지만 패배하고 많은 영토를 동인도 회사에 빼앗긴다. 1683년의 조약으로 전쟁은 종결되었지만, 트르나테는 네덜란드의 속국이 되었다. 과거 스페인의 동맹이던 티도레 술탄국은 스페인이 떠난 이후 홀로 트르나테–네덜란드에 맞서며 18세기 후반까지도 네덜란드의 영향력에 어느 정도 저항하는 독립국으로 남았지만, 18세기 말 티도레의 왕자 누쿠(Nuku)가 할마헤라, 서뉴기니 등 인접 지역을 끌어들여 대규모로 네덜란드의 지역 장악에 반발한 누쿠 반란(1780~1810)의 결과 결국 네덜란드의 영향권하에서 보호국화된다. 티도레 술탄국은 1904년 네덜란드에 의해 해산된다. 트르나테 술탄 무함마드 우스만(Haji Muhammad Usman, 재위 1902–1915)[* 마인어 외래어표기법을 준용하면 '무하맛 우스만'이지만, 트르나테는 비오스트로네시아계 언어권이므로 일단 어원인 아랍어 식으로 옮긴다.]은 종속적 위치를 벗어나고자 네덜란드에 대항하는 반란을 선동하였으나 실패하고 퇴위되어 [[반둥]]으로 유배되었다. [[인도네시아]] 독립 이후에도 트르나테 술탄직 자체는 상징적인 자리로서 유지되고 있다. 1796년에 지어진 트르나테의 술탄궁(kraton)은 오늘날까지 역사 박물관이자 현직 술탄의 거처로 사용되고 있다. 전임 술탄 무자파르 샤 2세(Haji Muzaffar Shah II, 1935–2015, 재위 1975–2015, 술탄위 재직 1986–2015)는 트르나테 술탄이면서도 한때 인도네시아 국회의원([[골카르]]), 북말루쿠 의회 의원 등으로 인도네시아 정계에서 실질적인 자리에 있었다. 무자파르 샤 2세가 2015년 사망한 후 술탄의 부인 가문 남자들이 트르나테 공(Prince of Ternate, 2012년 임명)으로서 트르나테섬의 명목상 주인이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