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인루겅 (문단 편집) === 매국의 길 === ||[[파일:기동방공자치정부수립.jpg]]|| || 기동방공자치위원회 설립을 선포하는 인루겅 || 일본은 화북 지역에서 밀무역을 행했는데 다롄에서 출발하여 진황도로 들어가는 일본 물품에 대해 인루겅은 검사비 명목으로 상징적인 적은 관세만을 징수하면서 일본인들의 환심을 샀다. 일본은 인루겅을 더욱 눈여겨보고 그에게 정전구 행정독찰전원을 담당하라고 부추겼고 인루겅은 기동 지역의 지배권에 욕심을 내면서 상관들에게 아첨하면서 자신이 기동 지역의 행정권을 담당하게 해달라고 로비했다. 결국 1935년 7월 27일, 도상명은 베이핑 평정회의 참의로 전근을 감에 따라 인루겅은 란유 지역의 대권을 전적으로 책임지게 되었다. 이에 관동군 특무 [[도이하라 겐지]]는 인루겅을 부추겨 지방자치의 기치를 세우라고 종용했고 인루겅은 일본 측이 자신에게 큰 기대를 거는 것에 크게 기뻐하며 대담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결국 1935년 11월 23일, 톈진의 호텔에서 일본 측과 담판한 인루겅은 11월 25일 기동방공자치위원회를 설립함으로 [[기동사변]]을 일으켰다. 국민정부는 격노하여 11월 26일, 행정원 부원장 [[쿵샹시]]의[* [[왕징웨이 저격 사건]]으로 인하여 부원장인 그가 행정원장을 대리하고 있었다.] 주재 하에 회의를 소집, 인루겅에 대한 체포령을 하달하였으나 11월 27일 난징 총영사 슈마 야키치로가 "여론을 무시하는 수단을 취한다면 일본 정부도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다."고 위협하고 일본군 화북주두군 사령부도 성명을 발표해 국민정부를 위협하자 실질적인 행동을 취할 수는 없었다. 더욱 기세등등해진 인루겅은 12월 25일, 기동방공자차위원회를 기동방공자치정부로 발전시켜 정무장관에 앉았다. 이후 [[중일전쟁]]이 벌어지는 1937년까지 괴뢰정부의 수괴로 거들먹거리며 밀무역, 아편 매매를 통해 부를 취했다. || [[파일:1937년은여경.jpg|width=400]] || [[파일:인루겅_mirejet.jpg|width=400]] || || 1937년의 인루겅 || 인루겅의 초상화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