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인루겅 (문단 편집) === 토사구팽 === 그러나 1937년 7월, [[루거우차오 사건]]을 계기로 [[중일전쟁]]이 폭발하면서 인루겅에게 위기가 닥쳤다. 일본군이 [[베이핑-톈진 전투]]를 벌이며 [[쑹저위안]]과 교전하던 중 인루겅에 불만을 품고 있던 기동방공자치정부 소속 보안대가 7월 29일 새벽, 통주 사건이라 불리는 봉기를 일으켰다. 인루겅은 일본의 지원을 받아 1만명 규모의 보안대를 양성한 상태였는데 이들은 일본군의 지원을 받고 있었지만 일본인들의 만행에 평소 불만이 많은 상태였다. 그러다가 일본군의 오폭으로 보안대에서 사상자가 발생했는 것으로 이들의 분노가 폭발, 보안대는 인루겅을 체포하고 2백명의 일본인과 조선인을 학살한 다음에 인루겅을 국민정부에 바치려 했다. 인루겅은 집무실 찬장에 숨어서 어떻게든 위기를 모면해보려 했으나 보안군이 인루겅의 하인을 붙잡아 인루겅에게 구원군이 왔다고 거짓말을 하게 했고 속은 인루겅은 기어나왔다가 그대로 체포되었다. 일본군은 이를 국민정부의 사주로 인한 폭동이라고 발표하는 한편, 1개 연대를 급파하여 통주 사건을 진압했다. 인루겅은 일본군의 도움으로 구출되었으나 많은 일본인 사망자가 발생한 사건의 원인을 제공한 혐의로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인루겅은 통주 사건에 책임을 지고 사형을 당하느니 마니 하는 위기에 처했으나 도야마 미쓰루를 비롯한 일본 정객들의 구명운동으로 목숨만은 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중국의 광대한 영토를 점령한 일본에게 있어 기동 지역의 작은 괴뢰정부 수장에 불과한 인루겅은 더 이상 이용가치가 없었고 일본으로 사실상 유배를 떠났다. 1939년에는 조선인 독립운동가 성만리(1911~1974)와 김병인이 인루겅 처단을 기도([[지청천]]이 밀명한 것)하기도 했다. 둘은 인루겅이 탄 열차에 폭탄을 던졌으나 실패하고 김병인은 사살당하고 만다. 성만리는 겨우 달아나서 이후 국민당군에 입대하여 일본군과 싸우기도 한다. 1940년 [[왕징웨이 공작]]이 성공하여 [[왕징웨이 정권]]이 수립되자 인루겅은 5년 만에 귀국, 1942년 [[왕징웨이]]에게 합류하였으나 산서성의 말단 자리를 얻었을 뿐이었다. 1944년 1월, 인루겅은 왕징웨이 정권 법무부에 자리를 얻었으나 자리에 불만을 품고 6월에 사직하여 베이징에 칩거하여 통주 사건 때 희생당한 260여명의 일본인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불경을 읊으며 경전을 필사하는 것으로 소일을 보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