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인목왕후 (문단 편집) ==== [[정명공주]]의 뒤늦은 혼인 ==== 딸인 [[정명공주]]는 [[광해군]] 대에 혼사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하고 [[경운궁|서궁]]에 죽은 듯이 유폐되어 있다가 인조반정 당시 21살이었다. 보통 10대 중후반에 혼인을 하던 그 당시에 아무리 [[조선/왕사|왕]]의 딸인 [[공주]]일지라도 21살이면 그냥 그 사실만으로 거의 혼삿길이 막히는 수준의 결격 사유이자 노처녀였다. 가뜩이나 늦은 [[결혼|혼인]]을 더 이상은 미룰 수 없었던만큼 인조반정 사흘만에[* [[공신]] 책봉은 물론 [[인조반정|반정]] 자체의 뒷수습도 안 끝난 시점이다. [[광해군]]이 [[유배]]조차 떠나지 않은 상황.] [[부마]] 간택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정명공주]]가 당시 기준으로는 혼기를 지나도 한참 지난 노처녀였다 보니 [[나이]]가 비슷한 부마감들은 죄다 이미 [[결혼]]까지 했거나 최소한 [[약혼]]은 한 상태에서 집안 사정상 혼례만 치르지 못했던 수준이고, 약혼조차 안 되었을 정도면 [[남자]]에게 정말 심각한 [[하자]]가 있는 경우였다. 이미 결혼한 사람더러 무르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공주를 하자있는 남자에게 시집보낼 수도 없으니, 약혼까지 한 사람들이라 해도 예외없이 부마 단자를 내도록 했고, 그 중 조모의 3년상으로 혼인을 미루고 있던 18살 [[홍주원]]의 약혼을 물려버린 다음 [[부마]]로 간택했다고 한다. [[인조]]는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집권 [[정통성]]을 세워주는 대의명분인 인목왕후를 우대하여 [[정명공주]]의 혼례를 호화롭게 치러주었으며, 그 뒤에도 계속해서 [[홍주원]]의 품계를 높여주거나 [[정명공주]]에게 [[땅]]이나 [[재산]]을 하사하는 등 후대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암태도 소작쟁의|소작 분쟁이 이어진 암태도]]도 당시 정명공주가 받은 땅의 일부로, 현대로 치자면 [[서울특별시/강남|강남]] 호화 [[아파트]]와 [[명품]] 살림을 신분을 이용하여 낙하산에 [[공짜]]로 준 셈이라 당연히 많은 [[논란]]이 있었다. 당시 [[신하]]들은 "주상(主上)께서 [[백성]]을 [[사랑]]한다면 이럴 수가 없습니다. [[정명공주]]와 [[왕실]]에 내리는 개인적인 일에 집착할 수가 있습니까. 정히 주고 싶으시다면 [[인조|왕]] 개인 자산에서 주십시오."라고 말할 정도로 크게 비판받았음에도 [[정명공주]] 모녀를 크게 대우했다. 인목왕후는 딸과 늦게야 결혼한 [[홍주원|사위]]를 총애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사위에게 오직 [[조선/왕사|임금]]만이 탈 수 있는 어구마까지 내려줬다가 비판받은 적도 있었다. [[인조]]는 재위 초기 발생한 [[이괄의 난]] 때 나름대로 챙겨주던 [[흥안군]]이 냅다 [[이괄]]에게 달려가 합류한 이후, [[조선/왕실|왕실]]의 [[방패]]가 되어야 할 [[종친]]들의 추가적인 이반을 막기 위해 신경을 많이 썼다. [[정명공주]]에 대한 우대도 그 중 하나였으며, [[조선/왕사|정통성]] 문제로 인목왕후에게 납작 숙여야 하는 입장이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