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인목왕후 (문단 편집) == 평가 == 개인적으로는 크게 특별한 능력없이 평범한 [[왕비]]에 지나지 않았으나, 정국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처신을 잘못했다는 평가는 사실이다. 이미 [[광해군]]이 버젓이 [[왕세자|세자]]로 있는 상황에서 [[선조(조선)|선조]]가 [[광해군]]을 멀리한다는 이유만으로, [[왕세자|동궁]]을 업신여기는 중궁전 소속 나인들을 제어하지 못해 측근관리조차 못하는 허술한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계축옥사]]에서 인목왕후와 그녀의 아버지 [[김제남]]이 [[의인왕후]]의 무덤에서 저주 행위를 했다는 진술이 나오는데, 사관은 대비측 인물이 (의인왕후 무덤에서 저주를 한 건 아니지만) '''[[공빈 김씨]](광해군의 생모)의 무덤에서 저주를 한 것은 사실이라고''' 기록했다. 조선 시대에서 저주는 매우 끔찍한 범죄였으며, 특히 왕실 일원에 대한 저주는 미수에 그치더라도, 들키는 즉시 주범부터 공범까지 죄다 '''멸족'''으로 대응할 만큼 극형으로 처벌했다. 이런 어마무시한 짓을 주변인들이 저지르는 걸 방관 내지 말리지 못했다는 건 인목왕후가 주변 관리에 상상초월할 정도로 무능했고, 마찬가지로 저주에 가담한 친정 가족과 측근들 역시 인목왕후에 버금갈만큼 처세술과 정치적 능력 모두 떨어졌다는 걸 의미한다. 그나마 무능해서 이러한 만행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면 좀 나은데, 의인왕후나 공빈에 대한 저주를 일부러 방관했다면, 광해군이 계축옥사에서 인목왕후의 친정을 거의 멸문으로 몰아넣을 정도로 편집증적인 태도를 보인 것도 일견 이해가 된다. 인목왕후의 행적상 정말 무능해서 측근들의 저주 행위를 몰랐을 가능성도 크지만, 그래도 명색에 왕실의 큰어른인 왕대비와 그 친정가문이 아랫사람의 전횡도 제대로 통제 못하는 모습은 좋은 모양새가 아니며, 더 나아가 방관한 것으로 오해를 살 위험이 크다. 또한 전임인 [[문정왕후]] 윤씨나 후임인 [[정순왕후(조선 영조)|정순왕후 김씨]] 같은 정치력이 없었고, 처세술도 썩 좋은 편이 아니었다. 이런 면모는 [[인조]]의 [[인조반정|반정]] 전후로도 고쳐지지 않았다. 당장 [[광해군]]이 [[폐위]]되자마자 "[[광해군]]과 [[폐세자 이지]]의 머리를 갖고 오라. 그들의 살을 씹어먹기 전에는 책명을 내리지 않겠다"거나 "[[이이첨]]과 유희분을 친국한 뒤에 책명을 내리겠다"고 하는 등, 자신은 한 일이 전혀 없는데도 자기 한이 먼저 풀려야 [[인조]]를 [[조선/왕사|왕위]]에 올려주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결국 [[인조반정|반정]] 주역들이 말린 뒤에야 자신이 감정적이었음을 인정한다. 이후에도 상기한 사위 [[홍주원]]의 예시에서 보듯, 조정의 큰 어른이라기엔 지나치게 감정적이고 생각이 짧으며 현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면모를 너무 많이 비춘다.[* 이것 때문에 인목왕후의 평가는 조선 최악의 [[눈치 없는 새끼|눈새]]로 귀결되는 편이다.] 물론 그나마 [[유영경]]을 무시하고 [[광해군]]의 즉위를 인정하긴 했지만, 친정 집안의 세가 약하고 나이도 어렸던 탓에 대비가 된 이후에도 권위가 크지는 않았다. 그러나 절대왕조국가 [[조선]]에서 [[조선/왕사|왕위 계승]]에 휩쓸린거 자체가 목숨을 걸어야 했던 중대사항이었는데 인목왕후의 부족한 처세술이 [[선조(조선)|선조]] 말기 [[조선/왕실|왕실]] 내부의 권력 투쟁과 결합해서 엄청난 비극을 초래하게 된다. 선조가 인목왕후 소생의 아들인 [[영창대군]]을 [[광해군]] 핍박의 수단으로 쓰지 않았거나 [[광해군]]이 [[편집증]]적인 의심병에 의해서 조성한 살벌한 공안 정국이 아니었거나, 본인이 욕심 or 한심한 처세를 하지 않았다면 그냥 [[조선/왕실|왕실]]의 어른으로 대접 받으며 평범하게 살았을 것이다. 어찌보면 [[선조(조선)|남편]]을 잘못 만나서 불행한 인생을 산 여성이라고 볼 수 있다. [[임진왜란]] 이래 [[선조(조선)|선조]]와 [[광해군]]은 [[조선/왕사|왕위]]를 둘러싸고 정적이 되었는데, 그 사이에서 아들 [[영창대군]]이 [[선조(조선)|선조]]에게 철저하게 이용당한 게 1번째 불행이었고, 조정과 재야의 지지를 두루 받으며 권위가 막강했음에도 끝없이 [[계축옥사|옥사]]를 일으킨 [[광해군]]의 [[편집증|의심병]]이 2번째 불행이었다. 10년 넘게 [[왕세자|세자]]위에 머무르며 [[임진왜란|전]][[정유재란|란]] 때 훌륭하게 [[분조]]를 이끌었다는 훈장달고 [[선조(조선)|부왕]]이 위협을 느껴 따져 보면 말도 안 되는 [[명나라]]의 승인까지 거론하며 견제했던 [[광해군|세자]]가 권위가 약할 리가 있겠는가? 그러나 그 막강한 권위에도 불구하고 [[광해군]]은 스스로 자기 살 까먹고 조정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행동을 재위 기간 내내 저질렀다. 엄밀히 말해 정략에서는 다음 왕 [[인조]]보다 못했는데, [[인조]]는 [[이괄의 난]]과 [[삼전도의 굴욕]]을 겪고도 재위 후반기 정국을 자기 뜻대로 이끌어가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반론도 많은데 다른 사람도 아닌 [[조선/왕사|국왕]]인 [[선조(조선)|선조]]가 직접 [[명나라]]까지 들먹이며 [[광해군]]의 권위를 흔들었고 그 결과 [[정인홍]]이 목숨 걸고 [[선조(조선)|선조]]에게 [[양위]]하라는 상소문까지 올려 조정에 난리가 나는 와중에, [[선조(조선)|선조]]의 [[사망|승하]] 직후 [[유영경]]이 [[조선/왕사|후임 국왕의 교체]]를 시도하며 [[선조(조선)|선조]]의 유지를 빼돌려 감춰버리는 [[반역]]에 가까운 조선사 초유의 사태가 벌어질 정도로 선조 말기 [[광해군]]의 [[왕세자|세자]] 지위는 심각하게 흔들렸다. 여기에 인목왕후의 고의였거나 관리 능력의 부족이었는지 아니면 단순히 철이 없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궁인들이 광해군을 공공연히 무시하는데도 제어하지 못하고, 본인도 법도를 어기고 영창대군을 세자처럼 예우하며 부정축재를 일삼은 인목왕후의 한심한 처세까지 겹치면서 그녀에 대한 평도 만만치않게 안 좋다. [[광해군]]이 인목왕후에게 저지른 짓은 잘못이지만 [[영창대군]]만큼은 왕권 강화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죽일 수 밖에 없었다는 의견도 나올 정도. 실제로 영창대군을 가지고 그토록 광해군을 핍박했던 선조조차 자신이 죽으면 광해군과 그의 지지세력들이 영창대군을 죽일 게 너무 자명했던지라 어떻게든 후폭풍을 막아보려고 했던건지, 승하하기 직전 '''"누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흔들리지 말고 이의를 네가 지켜야 된다"'''라는 간절한 유언을 남겼지만 당연히 광해군은 그 유언을 정면으로 어기며 [[계축옥사]]를 일으켜 영창대군을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조선]] 후기에는 <[[계축일기]]> 등을 통해 '어린 나이에 [[선조(조선)|늙은 왕]]에게 [[결혼|시집]] 가 [[붕당 정치|당쟁]]에 휘말려 [[선조(조선)|남편]]과 [[영창대군|아들]]을 잃은 가련한 왕비'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와서는 [[조선왕조실록]] 연구를 통해 선조말기 [[선조(조선)|선조]]와 [[광해군]]의 정치적 갈등과 그 과정에서 인목왕후의 실책이 드러나고[* 다른 부분은 차치하더라도 선조 말기에 보여준 행태는 누가 봐도 정말 명백한 실책이었다.] '광해군 긍정론'의 역풍을 받아 실 복수심에 매몰되어 [[인조]] 정권의 권위 확립에 이용당했다느니 하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했다. 2010년대 들어 제도사와 정치사 중심으로 [[광해군]]의 거품이 조금씩 가라앉으면서 반대로 인목왕후에 대해 지나치게 옹호하는 말들도 나오는 편.[* [[인터넷]]발 '광해군 긍정론'은 '광해군 긍정론'을 집대성한 한명기 교수의 견해와도 차이가 심하게 난다. 한명기 교수는 공과를 엄연히 구분해서 외치를 제외한 내치 대부분을 과오로 평했다. 그의 저서 <광해군>은 '탁월한 외교를 펼친 군주'라는 부제와 달리 1/3 정도는 영건 사업, 옥사, 수탈을 들어 비판하는 내용이다.] 결론적으로 권력에 가까이 가서도 안 되었고 권력을 쥐어서도 안 되었던 소시민적 깜냥과 짧은 지혜를 갖춘 평범한 인간이 지나치게 강한 권력을 가까이 하며, 스스로도 감당 못할 욕심을 품고 [[계축옥사|훗날의 결과]]를 생각치 않고 안일하게 처신했다가 비극을 경험했다고 볼 수 있다. 차라리 전임자인 [[의인왕후]]가 광해군이 즉위 때까지 살아서 본인이 애초에 [[왕비]]가 되지 않았거나, 아들을 낳지 않았거나, [[선조(조선)|선조]]가 더 오래 살아서 자기 생각대로 [[영창대군]]을 [[조선/왕사|왕위]]에 올리거나, [[광해군]]이 세월이 아닌 스스로의 힘으로 [[선조(조선)|선조]]를 이겨내고 도그마에서 벗어났다면 차라리 좀 더 행복했을 수도 있었을 인물. 비록 정치적으로 식견이 부족했고 처신이 안일했지만, 대비라는 존재로서 당시와 조선 후기에 끼친 영향은 상당했다. 당장 [[북인]]을 제외한 [[서인]]과 [[남인]]을 비롯한 대부분의 당파들이 [[광해군]]에게 등을 돌려 일어난 [[인조반정]]의 원인도 [[이항복]], [[이덕형]], [[이원익]] 같은 명재상들이 대비인 인목왕후의 폐모에 반대하다가 실각하고 대부분 [[유배]]를 당해 그곳에서 죽은 것에 대한 반발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