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인목왕후 (문단 편집) === 대비 시절 === [[선조(조선)|선조]] [[죽음|승하]] 시점에서도 나이가 너무 어린 탓에(20대 중반) 영향력은 크지 않았다. [[1608년]](선조 41년) 10월에 [[선조(조선)|선조]]가 쓰러졌을 때 숨이 가빠지자 [[광해군|세자]]에게 [[양위|전위]](傳位)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에 조정 내에서 유일하게 [[영창대군]]을 지지하던 탁소북 영수 [[유영경]]이 천부당 만부당하다며 반대하자, 당황한 인목왕후는 [[유영경]]과는 다른 처신을 하였다. >[[선조(조선)|성상]](聖上)께서 병중에 계신 지 1년이 다 되어가는데 심기 불편하심이 전보다 배나 더하오. 지금 [[선조(조선)|성상]]의 전교(傳敎)를 따르지 않으면 환후(患後)가 더욱 위중(危重)해질까 염려되니, 대신들은 전섭(傳攝)의 명을 따르도록 하오. 인목왕후는 바로 위에 서술된 내용의 교지를 [[언문]]으로 적어내면서까지 [[광해군]]의 지위를 확실히 인정했고, 끝내 [[선조(조선)|선조]]가 [[죽음|승하]]하자 [[광해군]]의 즉위를 바로 다음날로 서두르기까지 했다. 애초에 이미 [[선조(조선)|선조]]까지 사망한 상황에서 아무리 왕대비라지만 지지세력도 없고, 나이도 어린 인목왕후가 모든 당파의 지지를 얻는 [[광해군]]을 이길 방도는 없었다. 대비가 된 이후에도 [[광해군]]과는 껄끄러운 동행이 계속되었다. [[1611년]](광해군 3년) 때 [[영창대군|왕자 이의]]가 마침내 '''영창대군'''으로 봉해졌다.[* 비록 '대군'이 되었지만, 정작 [[선조(조선)|선조]] 살아생전에 대군으로 책봉받지 못했다. [[조선/왕실|조선 왕실]]에서 [[왕자]]들은 보통 10살 전후로 대군/군으로 책봉받는데, [[영창대군]]은 고작 3살 때 아버지 [[선조(조선)|선조]]가 [[죽음|승하]]하면서 아버지에게 직접 책봉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광해군]]은 영창대군이라는 봉호에 대해 "'영창'은 전국옥새에 들어간 글자이니 고치자"고 주장했으나, 당시 대비였던 인목왕후는 "선왕의 뜻"이라고 결사반대하면서 영창대군이라는 봉호를 고집했다. 그외에도 앞서 상술했듯 영창대군을 대군의 법도보다 과하게 (마치 세자처럼) 입히고 행동시켰으며, "인목왕후가 모은 재산이 국고에 모인 것보다 더 많았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재산에 대한 부정축재에 열을 올렸다. [[김제남]]을 비롯한 인목왕후의 [[연안 김씨|친정 식구]]들이 재산축재에 심하게 열을 올린 것은 [[임해군]]이 살해당한 이후부터였다. [[광해군]]이 즉위하자마자 [[유영경]]을 비롯한 탁소북이 즉각 숙청되면서 인목왕후를 지지해 줄 세력이 전무해졌고, 인목왕후의 친정아버지인 [[김제남]]도 무당파인데다 정치적 능력도 좋지 않았기 때문에 치부에 열을 올린 것으로 추정된다. "친형인 [[임해군]]도 죽인 [[광해군]]이 정비의 자식인 [[영창대군|이복동생]]마저 죽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후일을 대비하고자 한 행위였지만, 당연히 [[계축옥사]]가 터지면서 [[역적]]으로 몰린 인목왕후의 [[연안 김씨|친정]]은 풍비박산나고 재산도 전부 몰수당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