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인목왕후 (문단 편집) ==== '''[[계축옥사]]''' ==== [youtube(xnsPDiliX0c)] 위에서도 언급했다시피 20대 중반의 나이로 [[조선/왕실|왕실]]의 당대 큰어른인 왕대비가 됐지만[* 이때 받은 대비로서의 존호는 소성대비(昭聖大妃). 대중이나 미디어에서는 '인목대비'라는 칭호가 보편적이지만, 그 '''인목(仁穆)'''은 사후에 [[왕비]]로서 받은 [[시호]]다.] 나이가 어리고 [[연안 김씨|친정]]의 세도 약해서 영향력은 크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조선/왕사|조선 국왕]] 중에서 최다 [[친국|친국(고문)]] 기록을 가진 [[광해군]]의 [[편집증|편집증적인 의심병]]. 결국 광해군이 즉위한지 5년 째인 [[1613년]]에 광해군의 지지세력인 [[대북]]이 [[영창대군]]을 제거하기 위해 [[계축옥사]]를 일으키면서 인목왕후의 삶은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진다. 조작된 옥사에 크게 휘말려 친정아버지 [[김제남]]은 이유도 따지지도 못한 채로 [[사약|사사]]당하고 형제들도 처형당해 친정도 멸문당했으며, 자신의 아들 [[영창대군]]마저 역적의 수괴로 몰려 폐서인이 되어 [[유배]]에 처해지는 것을 눈뜨고 피눈물을 흘리며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김제남]]이 치부를 일삼은 부패한 사람인 것은 사실인데, 이 정도로 죽어야 한다면 조선왕조 500년 간 능지처참 당해야 할 왕실 구성원이 3자리 수는 가볍게 넘어갔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 시기 부패의 끝판왕은 바로 [[광해군]]과 그 대북파 측근들이었다. 광해군 및 측근세력은 '''방납(傍納) 커넥션'''과 연계되어 일선 관리들이 기준치의 최대 100배에 달하는 방납가를 매기는 것을 비호했다.] 끝내 영창대군이 유배를 떠난 지 단 1년만에 증살[* 방에서 뜨거운 열기에 쪄죽음]로 죽었다는 사실은 뒤늦게 전해 듣는다. 또한 자기 자신도 폐모론에 말려들었다. 이 과정에서 폐모 교지는 내려지지 않았지만 인목왕후는 대비 자리에서 쫓겨나 딸 [[정명공주]]와 함께 [[경운궁 석어당|서궁]]에 5년 동안 강제로 '''유폐(幽閉)'''되었다.[* 정확히는 인목왕후를 경운궁([[덕수궁]])으로 보내 유폐시킨 것이 아니라, 재건된 [[창덕궁]]으로 왕실이 이어한 것이다. 이 때 함께 머물던 인목왕후만 경운궁에 남기고, [[광해군]] 일가는 [[창덕궁]]으로 환궁해 돌아갔다. 이후 [[덕수궁|경운궁]]을 서궁으로 격하시키고 감시병 몇 명 정도만 둔 채 방치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