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인목왕후 (문단 편집) ==== [[경운궁|서궁]] 유폐 ==== 이때 인목왕후의 딸이자 [[선조(조선)|선조]]의 유일한 적녀(嫡女)인 [[정명공주]]가 함께 유폐되었다. [[정명공주]]가 [[옹주]]로 낮춰졌다는 기록은 없다. [[정명공주]] 참조. 유폐되던 당시의 정명공주는 16세로 이미 [[결혼|혼인]]하고도 남을 나이였으나, [[광해군]]이 혼인을 허가하지 않아 [[인조반정]]이 일어난 뒤에야 겨우 늦게나마 [[결혼|혼인]]할 수 있었다. 인목왕후와 [[정명공주]] 모녀는 [[경운궁|서궁]]에서의 유폐 생활을 묘사한 [[계축일기]]에 의하면, 의식주도 제대로 영위하지 못할 정도로 비참하기 그지없게 살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일화는 [[광해군]]의 악정을 극대화하기 위해 과장했다는 의견이 주류이다. 다만 인목왕후와 [[정명공주]]의 유폐 생활이 열악했다는 건 엄연히 사실로 보인다. 계축일기에 의하면 [[까마귀]]가 물어다 준 박씨를 먹거나 추운 겨울에 우연히 들어온 면화 씨로 옷을 지었다는데, 이런 게 실제로 가능했을리는 없고 그만큼 생필품과 생활비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고 살았다는 의미다. 인목왕후는 [[계축옥사|아들과 친정 가족까지 모두 몰살당한]] 이후 소복만[* 간혹 인목왕후가 나오는 사극이나 시대물에서 소복이 아닌 왕비의 적의를 그대로 입고 있는 장면이 그대로 나오는데 고증오류다. [[계축옥사]] 이후로 인목왕후는 자의적으로 소복만 입었고, [[인조반정]] 당시에도 소복차림으로 [[폐위]]교서를 내렸다.] 입고 소식을 하였으며, 폐비 절목에 따라 식사를 위해 궁 안으로 보내지는 어육과 쌀, 물도 모두 거부했다. 인목왕후를 따르던 [[궁녀]] 연이가 외부와 연락을 취했다는 혐의로 모함을 받아 형벌을 받는 등, 인목왕후의 지밀 궁녀나 상궁들을 향한 위협도 서슴치않게 일어났다. 아예 [[광해군]]이 직접 인목왕후를 감시할 궁인들을 선발해 [[경운궁|서궁]]에 보낼 정도로 당시의 정국은 매우 살벌했다. 정작 그렇게 [[광해군]]의 사주로 선발된 [[궁녀|궁인]]들은 박절[* 마음이 답답하고 고생스러움.]한 모습의 인목왕후를 보고 그녀를 성심껏 받들었다고 한다. 급기야 앞에서 언급된 것처럼 [[허균]]이 [[광해군]]의 명이라며, 자객을 동원해 [[경운궁|서궁]]을 습격하면서 [[암살]]당할뻔한 위협까지 겪었다. 다만 [[영의정]] [[박승종]]이 식솔들까지 동원해서 [[경운궁|서궁]]을 지키고,[* 이 때문에 인목왕후는 [[인조반정]] 당시 삼창의 처벌을 주장할 때 [[박승종]]은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박승종]]은 [[인조반정]] 이후 아들과 음독 [[자살]]했다.] 서궁의 숙직을 돌던 [[사헌부]]에서도 인목왕후를 보호했기 때문에 간신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아무리 [[폐위]]되었다고 해도 일국의 대비가 [[암살]]당할 뻔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인목왕후는 목숨조차 장담할 수 없는 절체절명의 상황에 처해있었다. 또한 [[광해군]]이 과거시험에 합격한 진사들에게 [[경운궁|서궁]]에 진배를 하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음에도 진사들이 끝까지 진배를 한 걸 보면, 비록 인목왕후는 공식적으로 폐비로 격하되어 [[경운궁|서궁]]에 유폐된 상태였지만 세간에서는 여전히 대비로 대우받았던 것으로 사료된다.[* [[명나라]]에서도 인목왕후의 [[폐위]]를 허락하지 않았다.][* 출처: 조선시대 당쟁사 1권 이성무(저)]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