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인문학 (문단 편집) ==== 인문학적 감수성이 실존하는가? ==== 인간의 삶과 사고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적 특성상 [[가치]]나 [[이데올로기|사상]]이 공부에 내재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인문학을 전공하는 학생은 같은 [[문과]]이면서도 상대적으로 사회과학 전공 학생들에 비해 감수성이 풍부하고 삶 그 자체에 대한 고민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굳이 비교하자면 사회과학은 '모든(혹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제도와 문화를 다루지만, 인문학은 '특정 인물'의 사고에 대해 집중적으로 파고들기 때문에 공감적인 요소가 더 많은 것. 실제로 인문학을 동경하여 인문대학에 진학한 대학생들 중에는 [[문학소녀]]나 청년 철학도 같은 희귀종들이 꽤 있다. 하단의 시에 이와 같은 인문학적 감수성이 잘 드러나 있다. > 내가 박식한 천문학자의 말을 들었을 때, > 증명과 숫자들이 내 앞에 줄지어 나열되었을 때, > 차트와 다이어그램이 더해지고 나누어지고 측정되는 모습을 보면서, > 강의실에 앉아 사람들의 박수를 받는 천문학자의 강의를 들었을 때, > 이상하게도, 갑자기 지치고 싫증이 나서 > 슬그머니 자리를 떠 밖으로 나와 홀로 거닐며, > 신비로이 촉촉한 밤 공기 속에서, 이따금씩, > 깊은 고요 속에서 별들을 바라보았다. > > 월트 휘트먼(Walt Whitman), 《When I heard the learn'd astronomer》 > ~~마이너스 곱하기 마이너스는 플러스가 되지만, 그 이유는 따지지 마세.~~ > ~~(Minus times minus equals plus, the reason for this we need not discuss.)~~ > > ~~위스턴 휴 오든(Wystan Hugh Auden)의 시 중에서~~[* 어디까지나 농담성으로 인용한 것이니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말자(…). 사실 해당 문장은 정확히는 그 시인의 평전에 대해 논평할 때 나온 것이지, 오든의 시에서 나온 게 아니다. ([[http://en.wikiquote.org/wiki/W._H._Auden|출처]])] 그러나 이러한 "인문학적 감수성"은 인문학 중에서 [[문예]]에만 한정된다. 문예를 제외한 다른 학문들은 [[논리학]]적 사고력을 바탕으로 현상의 사실관계를 분석하면서 발전해왔다. 근대 [[역사학]]의 기초를 다진 [[레오폴트 폰 랑케]]는 독일 [[역사주의]] 연구방법론을 발전시켰다. 랑케는 왕조를 정당화하기 위한 선전문구에서 역사학을 분리시켜 과학에 가까운 학문으로 만들었다. 물론 자연과학의 경험주의와는 조금 다른데 이에 대해선 해당 문서에서 다룬다. 가치판단을 연구하는 [[윤리학]]에서도 결국 학문적 논쟁의 향방을 가르는 것은 합리적 [[논증]]이다. 감수성은 [[논리적 오류/비형식적 오류|감정이나 힘에 호소하는 오류]]이다. 결국 인문학적 '감수성'이라는 용어 자체가 사실은 '논리적 사고'를 기반으로하는 이공계열로부터 그와 구분되는 자신만의 가치를 주장하기 위한 [[차별화 전략]]의 일종이며, 수박 겉핥기하듯 인문학에 발을 담근 이들로부터 비롯된 인문학에 대한 몰이해의 산물이다. 소위 '인문학적 담론'이라는 것들의 중심에 있는 철학부터가 논리학을 기반으로 하는 학문이므로, '인문학적 사유'가 무엇인지 철학 텍스트 한 줄이라도 읽어본 사람이라면 [[근본]]도 없는 '감수성'의 갑작스러운 등장은 황당할 수밖에 없다. 인문학과 이공계 모두 (사실의 비중을 떠나) 추론과 논리를 기반으로 결론을 세우는 기본적인 뼈대는 같기 때문이다. 그저 상술한 대로 인문학이 '생기 넘치는(?)' 대상인 인간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인간적으로 보일 뿐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