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인순왕후 (문단 편집) == 생애 == [[1532년]](중종 27년)에 청릉부원군 심강과 완산부부인 [[전주 이씨|이희경]][* 효령대군의 5대손으로, '용강현령 증 영의정 전성군 이대'의 딸이다.] 사이에 큰딸로 태어났다. [[1544년]](중종 39년)에 당시 [[경원대군]](慶原大君)이던 [[명종(조선)|명종]]과 [[결혼|혼인]]하여 부부인이 되었고 [[1545년]](인종 2년), 명종이 후사가 없는 [[인종(조선)|인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자 [[왕비]]로 책봉되었으며 [[1551년]](명종 6년)에 [[순회세자]]를 낳았다. 그러나 [[순회세자]]가 [[1563년]](명종 18년)에 [[요절]]하고 4년 뒤, [[조선/왕사|후사]]가 없던 남편 [[명종(조선)|명종]]이 [[죽음|승하]]하자 명종의 조카였던 [[덕흥대원군|서출]] 소생의 3남 하성군(河城君)을 즉위시켰는데 그가 바로 '''[[선조(조선)|선조]]'''이다. 하성군은 [[명종(조선)|명종]] 생전에도 이미 암묵적인 [[조선/왕사|후계자]]로 주목을 받았고 [[명종(조선)|명종]] 본인 역시 하성군을 후계자로 생각했다는 증거가 많지만, 정작 [[조선/왕사|후계자]]로 공식 확정하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명종(조선)|명종]]이 쓰러지고 유언조차 제대로 남기지 못하는 상태에서 당시 인순왕후의 밑으로 [[양자(가족)|양자]]로 입적되어서 인순왕후가 [[명종(조선)|명종]] 대신에 [[선조(조선)|하성군]]을 후계자로 확정한 것. [[1567년]](명종 22년), [[선조(조선)|선조]]가 즉위하면서 [[왕대비]]가 되어 1년 가까이 [[수렴청정]]을 한 뒤 물러났고, [[1569년]](선조 2년) '''의성(懿聖)'''의 존호를 받아 의성 왕대비가 되었으며, [[1575년]](선조 8년) [[2월 12일]]([[음력]] [[1월 2일]]) 앓고 있던 만성 기관지염이 악화되어 [[창경궁]] [[창경궁 통명전|통명전]]에서 44세의 나이로 [[죽음|승하]]하였다. [[능]]은 [[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동]]에 위치한 [[강릉(조선 명종)|강릉]](康陵)으로, 남편인 [[명종(조선)|명종]]과 함께 묻혀 있으며, 인근에는 [[시어머니]]인 [[문정왕후]]의 [[태릉(문정왕후)|태릉]](泰陵)이 있다. 한편 [[선조(조선)|선조]] 시기 동·서 붕당의 큰 원인을 제공한 [[심의겸]]과 심충겸은 인순왕후의 친[[남동생]]들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