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인순이 (문단 편집) === 전성기와 슬럼프 === 희자매의 첫 앨범 타이틀곡 '실버들'로 가요차트 7주 1위를 하였다. 1970년대 후반에 '바니걸스', '숙자매'와 함께 ‘걸그룹 트로이카’를 형성하며 많은 인기를 얻었다. 대히트를 친 희자매는 오래가진 못 했지만 다른 멤버들이 탈퇴한 후에도 그녀는 한백희를 따라 1981년부터 솔로로 활동하게 되었으며 지금도 많이들 부르는 '밤이면 밤마다'가 1983년에 공전의 히트를 쳤다. 또한 그 후 '인순이와 리듬 터치' ([[https://youtu.be/CrF82ipN0E0|당시영상]])로 활동했는데 '리듬 터치'는 한마디로 인순이의 뒤에서 춤을 추는, 지금의 백댄서 개념의 팀이었다.[* 이 리듬 터치 출신의 스타로 [[김완선]]과 [[이주노]]가 있다.] 하지만 1980년대 후반부터 그녀에게 슬럼프가 찾아왔고 이 와중에 한백희가 [[김완선]]을 데뷔시키고 뒷바라지에 집중하게 되면서 한백희와의 관계 역시 끝났다. 이때 인순이가 무릎팍도사에서 밝힌 바로는 한백희에게 '너는 지는 해, 그 아이는 뜨는 해' 라는 말을 들었다는데 사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논란이 있긴 하지만 한백희의 생전 성격을 봤을 때 저보다 더 심한 말을 했을 수도 있다.[* 훗날 김완선 역시 무릎팍 도사에 출연했을 때 그 이야기를 꺼내며 “이모가 그런 얘기를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인순이 언니가 많이 서운해 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인순이는 한백희에 대해 섭섭한 마음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그녀가 없었다면 데뷔도 할 수 없었을 거고 마지막 말이 없었다면 다시 일어설 수 없었을 거다' 라면서 그리워하기도 했는데 한백희의 조카인 [[김완선]]도 똑같은 애증을 밝힌 적이 있다. 여하튼 한백희와 헤어진 이후로 인순이에게는 긴 슬럼프가 찾아오고 이때부터 TV 활동이나 가수로서 화려한 무대는 거의 오르질 못하고 주로 야간 업소 혹은 복음성가 계열 등의 공연을 돌게 된다. 이 시기의 대표곡으로는 [[트로트]] 풍의 '착한 여자(1992)'이지만, 그것보다 더 유명한 곡은 [[김형석]]이 작사 작곡한 '이별연습(1989)'.[* [[윤종신]](2집, 1994년), [[박미경]](2집, 1995년)에 의해 리메이크되기도 했으며, [[나는 가수다]]에서 [[신효범]]이 불러 다시 한 번 화제가 된다.] 그리고 '착한 여자' 이후 결혼과 출산으로 긴 공백기를 가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