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인조 (문단 편집) == 개요 == [[조선]]의 제16대 [[조선/왕사|임금]]. 본명은 '''이종(李倧)'''. [[조선왕조]]의 네 번째 반정[* [[1차 왕자의 난]]([[태종(조선)|태종]] 1398년), [[계유정난]]([[세조(조선)|세조]] 1453년), [[중종반정]]([[중종(조선)|중종]] 1506년), [[인조반정]](인조 1623년)]인 [[인조반정]]으로 백부 [[광해군]]과 지지세력인 [[북인|북인(대북파)]] 일파를 대거 축출하여 [[조선/왕사|왕위]]에 올랐다. 아버지는 [[선조(조선)|선조]]와 [[후궁]] [[인빈 김씨]]의 5남인 [[정원군]]이며, 어머니는 [[인헌왕후|연주군부인 구씨]]다.[* 태어난 순서로만 보면 장남이자 적자는 [[인조]], 차남이자 서자인 [[능풍군]], 그리고 3남이자 적자인 [[능원대군]], 그 다음이 4남이자 적자인 [[능창대군]]이다.] 정원군의 장남으로, 능양군[* 작호는 친어머니의 본관인 [[전라남도]] [[화순군]]의 옛 고을인 '능주(綾州, 현 능주면 등 화순군 서남부)'에서 유래했다. 형제들도 역시 마찬가지.]으로 책봉되었다. '[[인조반정|반정]]'을 통한 인조(仁祖)의 집권은 실질적인 조선 제2왕조의 창건 및 [[조선]] 왕조의 [[중시조]]로 평가된다.[* 《모후의 반역》을 쓴 계승범 교수는 미국 박사 학위 논문으로 인조 반정의 [[광해군|직전 시대]]인 폐모 논쟁을 다뤘다. 폐모와 그에 따른 인조의 정변이 조선사, 나아가 세계사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조선]]후기 300년 간 진행된 제도개혁의 논의는 인조 시대에 모두 시작되었으며, [[조선/왕사|왕통상]]으로도 인조 이후 즉위한 조선의 임금은 마지막 군주인 [[순종(대한제국)|순종]][* 순종은 인조의 10대손이자 인조의 3남 [[인평대군]]의 직계 9대손이다.]까지 모두 인조의 직계후손들이다. 혈통상으로 [[고종(대한제국)|고종]]은 인조의 3남 [[인평대군]]의 직 후손이다.[* '''일단 형식적인 법적양자 관계로는 [[효명세자]]의 아들이니 __[[전주 이씨]] 계보를 늘여 본다면야 법적으로는 [[효종(조선)|효종]]의 후손__이다.''' 순서는 [[효종(조선)|효종]]→[[현종(조선)|현종]]→[[숙종(조선)|숙종]]→[[영조]]→[[사도세자|장조(사도세자)]]→[[정조(조선)|정조]]→[[순조]]→[[효명세자|문조(효명세자)]]→[[고종(대한제국)|고종]] 순이다.] 전술하듯 [[광해군]]은 물론 [[폐세자 이지|그 아들인 세자]]까지 장성한 상황에서, 능양군 이종의 [[조선/왕사|왕위 계승 순위]]는 거의 없다시피 했으나 [[인조반정|쿠데타]](정변)이라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추대되어 기어코 [[조선/왕사|왕]]이 되었다. 이에 상당수의 실무자와 중립세력들이 협력(혹은 최소한 방조)한 것이 특징적이다. 정권 안정성이 높은 조선사에서, [[인조반정]]이 군주를 교체한 조선 최후의 정변이 된 것은 이런 배경 때문이었다. 처음으로 [[청나라|청]]에서 [[시호]]를 받은 임금이지만 조선 조정은 조선전기와 마찬가지로 [[명나라|중국 왕조]]에서 내린 시호를 받기만 하고 실제로는 중국과의 외교 이외에는 사용하지 않았다.[* 예시로 《[[조선왕조실록]]》의 표제를 살펴 보면 《[[선조실록]]》까지는 《[[태조실록]]》, 《[[태종실록]]》, 《[[세종실록]]》, 《[[문종실록]]》, 《[[세조실록]]》, 《[[예종실록]]》, 《[[성종실록]]》, 《[[선조실록]]》처럼 조선 왕의 [[묘호]] 뒤에 명의 시호를 같이 붙이는 방식으로 사용해 왔지만 《[[인조실록]]》부터는 일말의 자존심이 있던 건지 아니면 오랑캐, [[청나라|청]]에 당한 치욕을 갚기 위한 건지 잘 모르겠지만, 청의 시호를 빼고 '인조대왕실록'과 같은 형식으로 조선 왕의 [[묘호]]만 제목에서 쓰게 된다. [[명나라|명]]의 시호를 받았지만 [[청나라|청]]에 완전히 복속한 후 [[숙종(조선)|숙종]]대에 와서야 [[묘호]]가 정식으로 주어진 《[[정종실록]]》도 앞표지에 '정종공정대왕실록'이라 안 쓰이고 '정종대왕실록'으로 쓰였으며, 역시 [[숙종(조선)|숙종]]대에 신원 복권된 《[[단종실록]]》도 앞표지에 '단종대왕실록'으로 기록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