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인조 (문단 편집) === [[병자호란]] === [[정묘호란]] 8년 뒤, 인조가 즉위한지 인조 13년([[1635년|1635]]) [[인열왕후]] 한씨(仁烈王后)가 [[사망|승하]]했다.[* 아이러니하게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터지기 직전에 인조의 가족들이 잇따라 사망한다. [[정묘호란]] 직전에는 인조의 친모인 [[인헌왕후|계운궁]]이, [[병자호란]] 직전에는 인조의 정비인 [[인열왕후]]가 승하한다. 게다가 [[인열왕후]]가 승하하기 전에는 대왕대비 [[인목왕후]]가 승하한 직후여서 사적으로 복잡한 상황이기도 했다.] 이에 [[후금]]은 사신 조문단을 보냈는데, 이와 함께 [[홍타이지]]를 존호(尊號)에 동참하자는 의견도 함께 보냈다. 표면상으로야 [[조선]]이 형제국이니 함께 의논하자는 것이었으나 사실상 [[명나라|명]]과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고 이제 자신을 형이 아닌 아버지, 황제로서 모시라는 압박이었고, 이 과정에서 [[후금]]의 사절단은 조선의 호위로부터 위협을 느껴 도주를 감행했으며, 3월 초 화친의 단절에 따라 팔도에 내려진 인조의 '절화교서(絶和敎書, 후금과 외교를 단절한다는 임금의 교지/명령서)'를 탈취하기에 이르렀다. 형제관계와 달리, 군신관계는 명의 조공국으로서 [[사대]]가 완강했던 당시 조선 사대부로서는 정말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명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는 하나 굳건히 버티고 있으며, 게다가 유교적으로 [[명나라|명]]을 부모의 나라로 섬기고 있었다.[* 명이 본격적으로 막장테크를 탄 건 [[이자성]]이 들고 일어난 [[1639년]] 이후의 일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청군은 난공불락의 요새 산해관을 넘지 못했다. 다만 수차례 화북을 대대적으로 약탈하여 조선에서 약탈한 양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인축(사람과 가축)을 노획하였다. 이자성이 중요한 것은 이자성으로 인해 [[오삼계]]가 청나라에 투항해 버렸기 때문이다. 당시 오삼계는 [[만리장성]]의 국경수비 총책임자였다.] 오히려 [[청나라|청]]이 [[산해관]]을 넘지 못하고 결국 자체붕괴할 가능성도 완전 배제할 수 없었다. 명이 부모의 나라에다가, [[임진왜란]] 때의 '''[[재조지은]]'''[* '''再造之恩, 망해가던 나라를 살려준 은혜, 즉 [[임진왜란]]([[1592년]]) 때 의주까지 도망쳐 조선이라는 나라가 완전 풍전등화에 놓여 있는 위기에 상국으로 모시는 명나라가 지원 응원군을 보내주어 침략해온 왜군을 물리치는 공, 큰 은혜를 이르는 말이다.''']까지 있어, 그 신앙이 크게 강화되었기에 이를 저버린다면 내부적으로 반정(反正)이 다시 한번 일어날 수도 있다.[* [[광해군]] 때 중립외교는 오직 광해군 혼자 했다. 집권당인 대북파는 대명의리를 무조건 따랐다. 심지어 광해군의 오른팔인 [[이이첨]]이 앞장서서 대명의리를 주장했다. 그리고 실제 명나라는 [[임진왜란]] 당시 20만 대군을 출병시키고, 기근의 허덕이는 조선 백성을 위해 100만 톤가량의 곡식을 보냈다. 물론 당시 황제인 [[만력제]]의 독단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국운이 쇠하고 있던 명에도 크게 부담이 되었으며 만력제는 '고려천자'라는 비아냥까지 들었었다. 참고로 슬쩍 발을 빼려는 명나라를 끝까지 붙잡은 사람이 바로 서애 [[류성룡]]이다.] 이는 대명의리를 반정의 한 명분으로 집권한 인조 정권 자체의 한계이기도 했지만, 현실적으로 봐도 당시 조선은 이중외교 이상을 할 수가 없기도 했다. 광해군이라고 해도 이 점은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고, 청나라 입장에서도 조선이 확실하게 굴복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청이 받아들일 가능성도 별로 없었다. 즉, [[병자호란]]은 피할 수 없었다는 뜻이다. [[4월 11일]] [[홍타이지|태종]] [[홍타이지]]는 존호 수여 행사를 통해 국호를 다이칭(大淸)으로, 연호를 '숭덕'(崇德)으로 교체하였다. [[4월 11일]] 존호례에서 조선의 사신 둘은 황제의 나라가 아닌 형제의 나라라며 배례(拜例)를 거부하고, 다음날의 행사에서도 성찬을 걷어차는 등 의례에 강제로 참석한 것에 대해 완강히 거부하였다.[* 이들은 차마 명나라와의 사대 관계를 저버리고 그 당시 오랑캐라고 멸시하던 신흥강국 청나라에게 사배를 다하는 배례를 할 수 없었기에 완강히 거부하였던 것이었다. 그로 인해 조선의 사신 나덕헌과 이확, 이 둘은 배례하던 청나라 군사들에게 반병신이 다 되도록 뚜들겨 맞고는 목숨은 붙여준 채로 조선으로 돌아간다. 인조는 이 둘이 답서도 받지 못하고 국서만 딸랑 들고 그냥(?) 돌아왔다고 화를 내면서 이들을 결국 [[전라도]] [[고흥군]]과 [[순흥]]에 유배보내게 된다.] 숭덕제는 이들에게 국서를 주었으나, 둘은 국서를 통원보에 버리고, 그 내용을 옮겨 조정에 보고하면서, 사실상 양국의 국서 교환은 끊어져 버렸다. [[1637년]](인조 15년) 1월[* 양력으로 계산한 것으로 [[음력]] 기준으로는 인조 14년이었던 [[1636년]] 음력 12월이었다.] 마침내 청군이 얼어붙은 압록강을 도하하여 주요 성들은 쑥쑥 지나친 채로 조선을 급습했다. 인조는 멀리 피하지도 못하고, [[강화도]]도 길이 막혀 못 가고, 남한산성에 갇혀버리고 만다. 남한산성에서 한동안 농성(47일 간)으로 버텼지만, 전쟁 전에 식량을 바깥으로 빼놓았기(청야전술) 때문에 결국 물자가 바닥났다. 이때 [[백제]] [[온조왕]]과의 인연으로 온조왕사(溫祚王祠)를 건립하게 되는데 자세한 설화는 [[남한산성]] 문서 참조. 온조왕사는 후에 [[정조(조선)]] 대에 [[팔전]] 중 하나인 '숭렬전(崇烈殿)'으로 한층 격상된다. 남한산성에 갇혀 있는 인조를 구하기 위해 출발한 각지의 근왕군(속오군)들은 고질적인 훈련도 및 조직력 부족을 여실히 드러내며 [[쌍령전투]] 등으로 청군에게 각개격파 혹은 차단(괴멸)되었으며, 심지어 압도적인 수적 우세에서도 청의 기동 전술에 휘말려 흩어진 경우가 많았다. 물론 피해는 크지 않았지만, 도망친 병사들을 다시 수습하는 과정도 일이고, 재조직해 다시 공격을 할 때는 이미 강화도가 함락되었다. 일부 승전을 거둔 근왕군들도 [[삼전도의 굴욕]]을 거둘 때까지 남한산성에 도착하지 못했다. 그리고 [[김자점]]의 주력 함경도 근왕군은 한번 털린 이후로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당시 김자점은 도원수(현재의 군 총사령관 급)이다. 원래 김류가 군을 지휘해야 하지만, [[김류]]는 당시 남한산성에 갇혀 있었다. 그래서 김자점은 도원수로 군을 통솔해야 하는데, 하지 않았다. 패했다고 해도 계속 청나라를 압박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다. 당시 청나라가 수도 한성을 포위한 것은 장기전에 불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김자점을 도원수로 임명한 사람이 바로 인조다. 장만은 비록 능력은 부족해도, 능력있는 부하에게 지휘를 맡기거나, 부하를 보호하는 등 개념있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김자점은 그러지 않았고 평안도 저 베이징 변방 부근에서 부하들과 술먹고 여자 끼고 자는 등 [[남한산성]]에 갇힌 인조 조정을 도울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 같다.] [[이괄의 난]]의 영향으로 중요지점에는 중앙의 측근들만 기용하고 국내 감시가 너무 심했던 것이 문제였다. 병자호란 때도 도원수 김자점과 중요한 요충지인 [[강화도]]의 장신, [[김경징]] 같은 무책임과 무능력자들을 임명했는데, 최소한 반란을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라는 --잘못된--믿음 때문이었다. 물론 인조의 가장 결정적인 실수는 각지의 사령관들을 잘못 임명한 것이지만, 당시 조선군이 집단 훈련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감시한 것도 있다. 이괄의 난 이후 기찰(감시와 통제)이 심각해졌고, 군 지휘관들도 트집잡히지 않기 위해 훈련 자체를 피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모문룡]] 밑에 있다가 청에 전향한 수군들까지 상대하게 된 강화도에선 [[김경징]]의 직무유기 이상의 망나니 짓으로 말미암아 [[여몽전쟁|몽골 침입]] 때도 굳건했던 강화도가 함락당해 그곳으로 피난한 왕자들이 [[포로]]로 잡히는 참극까지 벌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