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인조 (문단 편집) ==== 반정의 준비와 명분 ==== [[광해군]]은 상황 조성은 다해놓고 일이 벌어져 돌이킬 수 없게되면 슬쩍 물러나 악어의 눈물을 흘리는 일이었는데 이때도 마찬가지였다. 능창군을 죽는 것보다 비참한 신세로 만들어 놓은 다음에야 약과 의원을 보낸다, 자살을 병사로 보고한 지방관들을 처분한다 부산을 떨었지만 애시당초 근거도 없는 고변을 그대로 믿고 그 상황을 만든 사람이 누구던가? 평범한 왕족 능양군은 이때부터 광해군을 비롯해서 이이첨, 기자헌, 류희분, 박승종, 유몽인, 박홍구에게 복수의 칼을 갈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인조는 가만히 있다가 얼떨결에 오른 [[중종(조선)|중종]]과는 달랐다. 엄연히 반정을 주도한 입장이었다. 그래서 중종에 비하면 자기 목소리를 냈다. 이를 두고 정원군의 집에 '왕기가 있다'는 미신 때문에 능창군을 죽이고 [[정원군]]의 집을 빼앗아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이 화병으로 죽었다고 사관의 평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정작 전후사정을 살펴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 능창군이 죽은 것은 광해 7년의 일이고, 정원군의 옛집인 새문동에 서별궁([[경희궁]])을 지은 것은 광해 9년([[1617년|1617]]), 정원군이 죽은 것은 광해 11년([[1619년|1619]]) 말의 일이다. 화병으로 죽었다기에는 자식이 죽은 지 5년, 땅을 빼앗긴 지 3년이나 지난 시점이고, 오히려 아들이 죽은 다음 해에도 정원군은 [[광해군]]에게 존호를 올리며 아부하기 바빴고, 광해군도 정원군의 장례식에 종친 이상의 특별대우를 해준다. 정원군의 속내야 알 수 없지만 아들과 달리 겉으로는 아무런 한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럼에도 인조(능양군)는 신경진, 구굉과 함께 초기부터 [[인조반정|반정]]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긴, 명백한 주역이었으며 심지어 인조정권에 반기를 든 반란 세력들도 인정하는 바였다. 인조 정권 수립 직후 있었던 [[북인]]잔당의 반란기도에서 거론된 명분이 인조의 즉위과정에 대한 반발이었는데 그 내용이 마땅히 먼저 [[인목왕후|소성대비]](昭聖大妃)를 받든 다음, 그 명에 따라 임금을 정해야 하는데 금상(今上)은 스스로 왕위를 취했으니 옳지않다는 것이었다.[* [[1623년]] 무겸선전관(武兼宣傳官) 유전(柳湔) 역모사건에 대한 유응형(柳應泂)의 고변. 『인조실록』 권2, 인조1년([[1623년|1623]]) [[7월 27일]] 을묘(乙卯).] [[광해군]]의 폐위에 명분이 없다는 광해군 옹호론의 주장이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 폐모살제와 영건 사업으로 인한 민생파탄은 현대 대중들이 생각하는 그런 가벼운 게 아니었다. 광해군 재임기 15년간 조선의 민생은 이미 한계를 넘겨 파탄 직전에 있었다. [[광해군]]을 죽이지 않은 건 그가 한때 왕이었고 여전히 왕족이었기 때문이지, [[인조반정]] 명분이 부족해서라고 단순히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조선]]에서 왕과 왕족은 엄연히 사대부들 위의 최상위 특권계층이었고, 아무리 죄가 커도 왕족을 함부로 죽이려드는 왕은 없었다. 보다 쉽게 설명하자면 모후(인목왕후)를 폐하고 아우([[임해군]], [[영창대군]])를 죽인 [[광해군|폭군]]을 징죄(懲罪)함을 명분으로 삼은 임금이, 폐주라 하나 자기 삼촌을 죽이면 명분, 정통성이 살겠는가? 그래서 인조 즉위의 명분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광해군은 건강해야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