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인조 (문단 편집) === [[이괄의 난]] === 인조 정권은 초장부터 불안했다. 집권 직후에 서인들은 남인들과 같이 정권에 참여하면서 [[북인]]에 대해 처벌을 논의했는데 이때 남이공과 김신국을 비롯한 실무 관료들은 살아남지만 북인 정권에서 권신이었거나 [[광해군]]의 측근 세력들은 예외도 없고 가차없이 엄격하게 처벌했다. 이것이 실행에 옮겨져서 최고 권력 집단이었던 대북은 [[이이첨]]을 처형시키고, [[유몽인]]과 [[기자헌]]을 유배보내서 완벽하게 분쇄해 갈아버렸다. 반정의 명분이었던 폐모론에 소극적이었던 소북도 예외도 아니게도 처벌했는데 하필이면 대북이 숙청될 때와 같이 행해졌고, 이때 [[류희분]]이 처형당하고, [[박홍구]]는 유배 조치에 처해졌다. 규모가 커지게 되자, 서인들 내에서도 부정적인 의견이 나왔지만, [[북인]]을 그대로 살려두면 반드시 재기하여 서인에 견제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시간이 흐르면서 북인 숙청에 대해서는 협조적으로 변하게 되었다. 이렇게 대북과 소북에 대한 숙청은 이뤄졌고, 이이첨, 류희분, 기자헌, 유몽인, 박홍구를 비롯한 북인 권신들은 벼락을 맞게 되었고, 그들의 가문들은 [[풍비박산|멸문지화]]가 나며 완전히 몰락했다. 이렇게 대북과 소북을 가리지 않는 잔인한 북인 처벌에 대해 [[박승종]]은 처벌이 두려워 아들과 함께 자결할 정도였고, [[이원익]]도 역시 한탄할 만큼 지나친 일이었다. 이런 일이 벌어지자 [[북인]]들은 이에 반발하며, 바로 [[광해군]] 복위 운동과 [[흥안군]]과 [[인성군]]을 중심으로 종친을 왕으로 삼아 광해군을 태상왕으로 옹립하려는 역모를 세우기 시작했다. [[1623년]](인조 1년)에 인조반정이 일어난 직후에 유몽인은 바로 [[흥안군]]을 옹립시키고 [[광해군]]을 [[상왕|태상왕]]으로 삼는 계획을 세웠으나 발각이 되어 유몽인은 바로 처형되었다. [[1624년]](인조 2년)에 [[이괄의 난]]이 끝난 직후에 박홍구가 유몽인과 비슷한 계획은 세웠고, [[흥안군]]이 이괄과 한명련에 의해 같이 옹립되다가 처형당했기 때문에 옹립할 종친을 [[인성군]]으로 바꿔 계획을 꾸몄으나 이것도 역시 발각되어서 박홍구도 처형되었다. [[북인]] 숙청을 마무리하고 이후에 서인 정권이 안정세로 돌아가자 [[광해군]]은 유배지에서 식음을 전폐하며, 목욕을 하지 않고 하루종일 울었다고 한다. 그리고 반정 공신 [[이괄]]에 대한 혐의가 공신들의 내분(논공행상)으로 이어져 [[이괄의 난]]이 일어난다. 이괄은 반정의 동료들이 자신의 아들을 역모 혐의로 하옥하려고 하자 화가 폭발한다. 문제는 당시 [[이괄]]이 부원수로, 조선의 북방 군대를 사실상 전담하는 위치에 있었다는 것. 하다 못해 이괄의 군권이라도 빼앗고서 숙청을 해야할 것인데 정작 군권은 그대로 놔둔 채 숙청을 시도했고, 그 결과 이괄은 아들을 잡으러 온 금부도사[* 왕의 어명(御命)을 받은 선전관인 금부도사를 처형하는 것은 [[역모]]나 다름이 없다.]를 살해한 뒤 [[청나라|후금]]을 막기 위해 훈련받은 군사 1만을 끌고 남하하여 [[안주시|안주]], [[평양시|평양]], [[황주군|황주]], [[개성시|개성]]을 [[전격전]]의 속도로 함락하고 수도 [[한성부|한성]]까지 점령한다. 내부 반란으로 수도 한성을 점령당한 조선 시대의 반란은 이 반란이 유일무이하다.[* 조선 중기의 무신 [[이괄]]은 인조 반정 때 군사적으로 지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인조의 총애를 받던 [[김류]]와 [[이귀]]처럼 다른 공신들과 사이가 틀어져서 2등 공신으로 밖에 배정을 받지 못해서 벌어졌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논공행상에 따른 권력 다툼이었다.] 인조는 [[파천]]하여 [[의자왕]]이 그랬던 것처럼 [[충청남도]] [[공주시|공주목]]의 [[공산성]]으로 피신하였으며 [[이괄]]은 [[흥안군]]을 임금으로 추대하였다. 파죽지세로 진격하던 반란군은 [[무악재]](안령)에서 도원수 장만이 이끄는 토벌군에게 참패, [[경기도]] [[이천시|이천]]으로 퇴각하였다가 자신의 심복들에게 살해되었다. 인조는 [[이괄]]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이괄의 잔당에 의한 기습을 우려해 [[공산성]]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다 이괄의 목을 국왕에게 바치는 헌괵례(獻馘禮)를 거행한 뒤에야 [[공주시|공주목]]을 떠났다. 5일 동안 [[공주시|공주]]에 머물면서 인조는 문.무과를 치러 공주의 인재를 뽑았고 충청관찰사와 병사, 공주목사의 품계를 모두 올려줬다. 무사히 반란을 피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한 보답이었다. 또한 그가 머물던 곳에 있던 2그루 나무에게 정3품 품계를 내렸고 그 옆에 이를 기념한 쌍수정(雙樹亭)이라는 누정이 세워졌다. 쌍수정 옆에는 인조가 공주에 머문 사실을 기록한 사적비와 비각이 있는데, 인조를 수행한 우의정 신흠이 글을 지었고, [[숙종(조선)|숙종]] 때 영의정 남구만이 글씨를 썼다. 이로 인해 조선 북방의 방위체계가 붕괴되었다. 게다가 후에 [[이괄]]의 부하들은 청군에 투항하고 편입되어 수도(한성)까지의 지름길을 알려줘 국방에 엄청난 타격을 입히게 된다. 결국 인조의 허술한 숙청은 북방군 체계를 완전히 붕괴시키고 핵심 인력들을 반란군&청으로 이탈시켜 [[조선]]을 공격하게 만드는 [[정묘호란|대]][[병자호란|가]]를 치른다. 참고로 인조가 피신했던 [[공산성]]은 [[백제]]의 2번째 수도 [[웅진성]][* 현재의 [[충청남도]] [[공주시]] 소재]이 위치했던 곳으로 후에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꿈에 나타나 위기에서 구해줬다는 설화와 관련지어 보면 이래저래 [[백제]]와 인연이 있는 모양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