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인조 (문단 편집) === [[정묘호란]] === [[서인]] 정권은 흔히 '친명 배금' 정책을 고수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오히려 반정공신들은 [[최명길(조선)|최명길]]과 같이 대부분 주화론자였다. [[병자호란]] 직전까지 인조 정권이 (후대의 [[효종(조선)|효종]] 같은 경우와 비교해) 적극적인 반청 정책(북벌)을 일으킨 적은 없다. 오히려 일각에선 [[광해군]] 대의 외교적 성과를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계승했다는 연구도 있다. 광해군 대의 [[외교]] 관련 업무를 맡은 대신들을 유임하고, 내부적으로 [[후금]]을 자극하지 않기 위한 논의가 있었다는 것들이 그 근거로 제시된다. 그러나 일반 백성들에게 친청(친후금) 정책을 표방한 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문제였다. 당시는 원리주의적인 성리학이 강해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 결론은, 결국 이런 친명 배금 정책 덕분에 인조 5년([[1627년|1627]], 정묘년)에 또 쳐들어오게 된 것이다. 애초에 반정 세력의 주요 인물인 [[이귀]]나 [[최명길(조선)|최명길]] 등은 주화파였다. 하지만 [[김자점]]은 친청파의 대표적인 인물로, 나중에도 그런 오명을 얻게 되지만, 당시에도 숫제 [[매국노]] 취급이었다. 이렇게 반정을 일으킨 주요 서인 멤버들을 특별히 '''공서'''(훈서)라 하는데, 광해군 시절의 북인(특히 대북)들보다 더 현실주의적인 세력들이었다. 그러니 현실적인 외교 방법을 논한 것이 어찌보면 당연했다. 그러나 정권의 안정성을 위해 끌어들인 재야 서인들[* 이들을 '''청서'''라고 일컬었다. 특히 [[김상헌(조선)|김상헌]]이 여기에 속한다.]은 명분을 중요시하여 척화(斥和, 화친을 배척하는 정책)를 강하게 주장했다. 그럼에도 [[후금]]을 되도록 자극하지 않고자 하는 의도는 있었을지언정[* 인조반정의 중심인 이귀 역시 고려 때처럼 [[송나라]]([[남송]])와 [[금나라]]를 동시에 섬겼는데 조선도 그러면 된다고 주장했다. (사실 이 문제는 [[요나라]] - [[북송]] 때도 그랬다.) 문제는 명나라가 송나라와 달리 갑자기 무너졌다는 것이다. 사실 [[영원성 전투]]를 봐도, 당시 [[청나라]]는 대국인 [[명나라]]를 무너뜨릴 힘이 없었다는 것이 정론이다. 조선에 근접한 만주와 요동을 잃었다고 몇백년을 버텨온 강국 명나라가 바로 몰락한 것은 아니었다.] 쓰러져가는 명나라를 꿋꿋이 상국으로 섬기며 정권의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해 친명배금 표방은 차마 버리지 못했다. [[광해군]] 때부터 모든 조선 사대부들의 동일한 사대주의 인식이었다. 이런 인식이 엎어진 건 [[병자호란]] 이후 더이상 명나라를 도울 수도 없고, [[명나라|명]]이 청의 공격도 아닌 농민 반란으로 스스로 망해 실망을 금치 못한 뒤이다. 전쟁의 원인은 [[천명제]] 누르하치와 [[숭덕제]] 홍타이지 시절의 대조선 정책에 대한 의견 차이와 정치적 원인이 컸다. 청은 기세등등했으나 [[산해관]]조차 넘지 못하고 있었으며, 누르하치가 조공무역을 독점하며 쌓아올린 경제력이 홍타이지 때 즈음에는 고갈되는 중이었다. 여기에 [[내몽골]]을 평정한 이후 [[1626년]]까지 [[만주]]에 2년 ~ 3년 연속의 대기근이 닥치면서, 청은 심각한 경제적 위기에 처했다. 이런 시점에서 청은 산해관 너머로 들어갈 국력을 유지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조선과 명나라에게 공격적인 요구를 했으나, 점점 비굴해져가는 상황이었다. [[1627년]]에는 식량값이 8배로 뛰어 군대를 유지하기도 벅찬 지경에 이르면서, 홍타이지에게는 그야말로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또한 광해군 대의 조선은 이미 광해군과 [[박승종]]의 명을 받은 정충신이 후금의 정보를 캐내고, 홍타이지를 집중적으로 경계해 그가 후계자가 되기 이전부터 주목하며 철통 같은 방비를 하고 있었기에, 홍타이지는 조선을 칠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었다.[* 조선에 우호적이었다거나 그런 것이 아니라 조선을 칠 여력이 없던 것이다. 당장 [[정묘호란]]에서 [[후금]]이 동원한 군사는 고작 3만밖에 안 되었고, 조선은 [[이괄의 난]] 등으로 북방 방어선이 아작이 나있는 상태에 후금군은 안내꾼들까지 데리고 갔음에도 불구하고 적당히 강화를 맺고 물러나야할 정도로 어려운 상황이었다.] 전쟁이 임박한 시점에선 이중외교([[광해군]] 식 외교)를 폐기하자는 척화론이 강하게 대두했으나, 정권 내부에선 사실상 무시되었다. 그러나 그 알맹이는 실속도 명분도 챙길 수 없는 어중간한 것으로서, 확실한 화친정책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명에게 도움을 기대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격동하는 주변 정세 속에서 인조는 이렇다할 대책을 세우지 않은 채로 이중외교만 어느정도 유지했고, 때마침 누르하치 사후 조선에 대해 정벌하고자 하는 마음이 강한 강경파였던 홍타이지의 등극이라는 악재를 연타로 맞이하고, [[이괄의 난]]으로 인해 국경 방비는 아작났는데, 광해군 때의 방비의 절반만 복구해도 막아낼 수 있을 것으로 정충신이 평가하고 인조를 설득했음에도 결국 반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결국 [[정묘호란]]([[1627년]])을 겪게 된다. 당시 광해군의 복수를 명분으로 내건 [[후금]]은, 다소 저항을 받았지만 계속 한성으로 진격해갔다. [[이괄의 난]] 때문에 북방을 담당하는 방어군이 거의 무너진 것이 큰 영향을 끼쳤다.[* [[정묘호란]]이 벌어진 가장 큰 원인이다. 이것이 아니었다면, 홍타이지에게 조선을 치는 것은 안 그래도 유지하기 힘든 군대를 완전히 말아먹어 어렵게 탄생한 후금이라는 나라를 멸망에 몰아넣는 [[뻘짓|삽질]]이 될 것이었기에, 조선을 직접 칠 생각은 상황상 못했을 것이다.] 당시 서인 정권들도 전략 수립에 [[이괄의 난]]으로 인한 전력 공백과 반란군 진압시 병력 피해 등도 알고 있었기에 병력 증강에 힘을 기울였다.[* 인조 정권 초반 조선은 후금에 대한 대방어 전략으로 서북 방면의 거점 방어를 최우선시 하였고 그에 따라 방어 체계도 어느정도 수립됐다. 그러나 [[이괄의 난]] 으로 인해 약화된 서북 지역 방어 대신, 임진강, 한강, 강화도 방어를 가장 중요시하는 수도권 방어 체계가 중심이 된다. 수도권 방위를 위해 총 2만 4천에 달하는 병력을 부랴부랴 증강시키기도 하고, 수세적 방어 전략을 중심으로 삼았으며, 후금의 진격 루트를 1. 의주 - 용천 - 철산 - 정주 - 안주 2. 벽동 - 창성 - 삭주 - 귀성 - 태천 - 영변 - 안주 두 가지로 예상하고, 방어 진지와 산성 정비 등 방어 태세를 강화하여 중앙군인 [[훈련도감]]의 병력 250명과 충청 / 전라 / 경상도 = 하삼도 병력 5,000명을 서북 지역에 이동시키며, 함경보 남부 병력 2,000명을 평안도로 배치하는 등, 이괄의 난으로 인해 1만 미만(8,500명)이던 변경 수비 병력을 16,000명으로 증강하였다.] 하지만 이괄의 난으로 급격히 약화된 서북 지역의 군사력 등으로 인해, [[인조반정]] 이후 계획된 [[후금]]에 대한 군사 전략은 그대로 작동하기 힘들었다. 또한 이괄의 난 이후 강화된 기찰[* 조금이라도 군사의 움직임이 있는지 중앙 조정에서 파견해서 감시하는 일종의 감찰 제도이다.]은, 북방 무관들이 제대로 된 훈련조차 맘 놓고 못하게 만들었다. 정묘호란 중 자폭하면서까지 분전한 영변부사 [[남이흥]]은, 유언을 "조정(朝廷)에서 나로 하여금 마음대로 군사를 훈련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강한 적을 만나 죽는 것이 진실로 내 일이지만, 이것이 한스러울 뿐이다."라고 남기기도 했다. 결국 [[강화도]]로 도망쳤던 국왕(인조)은 직접 형제의 맹세를 맺는 단에 나갔고, 스스로 피를 마시지 않고 신하가 대신 마시는 선에서 후금과 형제국으로 관계를 재정립했다.(정묘화약, [[1627년|1627]].) 그러나 후금은 어거지로 조선과 명의 관계를 단절시킬 생각은 없었는지, 사대에 대한 조공 자체에는 문제를 삼지 않았다. 또 [[가도]]의 [[모문룡]]을 함께 토벌하기도 했다. 후금에 세폐를 보내느라 온갖 공물을 징발하는 통에 애꿎은 조선 백성들만 허리가 휘었지만, 조정에서는 대충 넘어가며 어영부영 8년이 흘렀다. 그러나 후금은 명국 정벌의 목전에서 여전히 친명정책을 포기하지 않는 조선의 태도에 앙금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조선의 인조 정권은 전쟁을 할 상황이 아니었다. 여기에 후금과의 사이는 다시 나빠져서, 인조는 국교 단절까지 생각하게 된다. 도원수 [[김시양]]과 부원수 [[정충신]]이 전쟁나면 큰일난다고 막긴 했지만, 결국 둘은 인조의 눈 밖에 나 유배를 간다. 그리고 후임으로 임명된 도원수가 바로 '''[[김자점]]'''이었다.[* 인조가 김자점의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몰랐다고 할 수 없다. 애당초 여러 논의를 할 때 자신이 김자점의 허접한 전쟁 대처 논리를 박살내 놓은 바 있다. 하지만 결국 김자점을 도원수로 기용하지 않나, 김자점 외에 도원수에 어울릴 만한 인재들을 배제하지 않나... [[병자호란]]에서 수수방관했는데도 용서할 정도였다. 최소한 [[선조(조선)|선조]]가 [[원균]]을 잘못봤을 때처럼, 큰 사고를 안 치니 평범한 장수는 되는 걸로 오인한 것이 아니다. 인조 본인이 딱히 김자점의 군사적 능력을 과대평가했다기보다는 김자점이 무능할지언정 최소한 이괄처럼 자신에게 반역을 저지르지는 않을 거라는 막연한 믿음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괄의 난으로 인한 트라우마 때문에, 이괄처럼 유능한 인재에게 군사적으로 중요한 직책을 맡겼다가 그 인재가 제2의 이괄이 되어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자점이 훗날 반역을 시도했다가 발각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으니(물론 인조 사후 [[효종(조선)|효종]] 대에 일어난 일이지만) 내우외란으로 불안했던 인조 시대의 예고된 비극이었다고 할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